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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공저)》, 일조각, 1985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한국학보》 제11권 4호, 1985
*〈지상논단: 고조선사의 재인식〉, 《통일한국》 32권, 1986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한국 상고사 체계의 복원〉, 《동양학》 제17집, 1987
*〈고조선과 삼한의 관계〉, 《한국학보》 14권 3호, 1988
*〈삼한지역의 사회변천〉, 《백산학보》 35호, 1988
*《상문명(번역)》, 민음사, 1988
*《중국의 천하사상(공저)》, 민음사, 1988
*〈고조선의 건국- 드디어 한민족은 국가를 출현시켰다〉, 《월간샘터》 제20권 4호, 1989
*〈고조선의 국가구조- 고조선은 봉건제국가 읍제국가였다〉, 《월간샘터》 제20권 8호, 1989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통치하였다〉, 《월간샘터》 제20권 7호, 1989
*〈고조선의 지도이념은 ‘홍익인간’이었다- 선교〉, 《월간샘터》 제20권 12호, 1989
*〈단군-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이자 종교지도자였다〉, 《월간샘터》 제20권 9호, 1989
*〈단군신화-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민족사화이다〉, 《월간샘터》 제20권 5호, 1989
*〈명도전- 고조선은 외화를 많이 보유한 부유한 나라였다〉, 《월간샘터》 제20권 11호, 1989
*〈무리사회- 사람들은 초기에 이동생활을 하였다〉, 《월간샘터》 제20권 1호, 1989
*〈부락사회- 사람들은 부락을 이루게 되었다〉, 《월간샘터》 제20권 2호, 1989
*〈부락연맹체사회- 여러 부락이 연맹을 맺게 되었다〉, 《월간샘터》 제20권 3호, 1989
*《새로운 한국사(공저)》, 삼광출판사, 1989
*〈역사의 주체- 한국사의 주체는 한민족이다〉, 《월간샘터》 제20권 6호, 1989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1989
*〈조연전쟁- 고조선은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다〉, 《월간샘터》 제20권 10호, 1989
*《한국사의 이해 1 - 고대, 고고(공저)》, 신서원, 1991
*〈한국 고대사의 제문제〉, 《명지대학교 개회40주년 기념논문집》, 1989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동서로 대치되어 있었다- 우거왕〉, 《월간샘터》 제21권 4호, 1990
*〈고조선의 붕괴- 고조선의 붕괴원인은 철기 보급과 전쟁이었다〉, 《월간샘터》 제21권 7호, 1990
*〈공후인- 고조선에는 수준높은 문학·음악·청동기술이 있었다〉, 《월간샘터》 제21권 1호, 1990
*〈동이전은 열국시대에 관한 기록이다- 동이전〉, 《월간샘터》 제21권 9호, 1990
*〈부여는 열국시대 초기의 패자였다- 부여〉, 《월간샘터》 제21권 10호, 1990
*〈부여의 정치- 부여는 자주적인 화친정책을 취하였다〉, 《월간샘터》 제21권 11호, 1990
*〈열국시대- 열국시대는 민족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월간샘터》 제21권 8호, 1990
*〈위만조선은 난하유역에서 건국되었다〉, 《월간샘터》 제21권 3호, 1990
*〈읍루는 한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읍루〉, 《월간샘터》 제21권 12호, 1990
*〈준왕- 준왕은 고조선 왕이 아니다〉, 《월간샘터》 제21권 2호, 1990
*〈평양유적은 낙랑군유적이 아니다- 낙랑유적〉, 《월간샘터》 제21권 6호, 1990
*〈한사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 한사군〉, 《월간샘터》 제21권 5호, 1990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열국의 변화〉, 《월간샘터》 제22권 2호, 1991
*〈열국시대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였다- 열국시대의 성격〉, 《월간샘터》 제22권 3호, 1991
*〈읍루는 고구려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읍루의 사회〉, 《월간샘터》 제22권 11호, 1991
*《중국사1》, 민음사, 1991
*《한국사의 이해 1 - 고대, 고고(공저)》, 신서원, 1991
*〈고대조선고〉, 《중재 장충식박사 화갑기념논총》 1권 역사학편, 1992
*〈양평 병산리 유적〉, 《고적조사보고서》 14권, (단국대학교), 1992 (공동저자 한창균)
*《중국사2》, 민음사, 1992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연구소총서》 1책, 1992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 《동양학》 제23집, 1993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 비판과 반론 ==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보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북한 학설을 유포하여 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한다고 매도당했다.<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이와는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처럼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윤내현이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의 당시 총장에게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윤내현은 학교의 입장이 난처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시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고 주장한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하지만 윤내현은 연구비 지원에 대해서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없다며《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ref>,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또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연구비와 관련된 비판에 대해서도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윤내현은“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말하고 있다. <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연구비와한편 관련된북한 비판에학설을 대해서도인용했다는 일체이유로 외부기관으로부터용공학자로 연구비를비방당하고 받은정보기관의 사실이조사를 없다고받았다는 주장했다주장도 있다.<ref>《우리[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고대사비운의 -역사학자 상상에서윤내현 현실로》,지식산업사,서울신문 2003, p기사]</ref><ref>[https://shindonga.229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
한편 북한 학설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용공학자로 비방당하고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하며,<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 서울신문 기사]</ref><ref>[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또한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당시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총장의 만류로 사직하지 않았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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