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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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 [[원소 (후한)|원소]](이복형제), [[조조]]
|자녀= [[원요]]
|관련활동= 독자 세력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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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袁術, ? ~ [[199년]])은 [[중국]] [[후한]] 말의
▲'''원술'''(袁術, ? ~ [[199년]])은 [[중국]] [[후한]] 말의 페주로 위.백의 악조 알틱 같은놈이다. [[자 (이름)|자]]는 공로(公路)이며 [[예주]]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명문 원가의 적자였는데 못된 성격을 참지 못해 스스로 중ii임을 인정하였다. [[얼자]]인 [[원소 (후한)|원소]]와 대립하였다.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가장 큰 실적을 쌓았음에도 원소와 찢어져 서로 [[전쟁]]을 벌이다 [[양주 (안후이 성)|양주]]로 쫓겨났다. 세력을 회복해서는 [[황제]]를 자칭하고 사치를 일삼았으며 여러 [[전투]]에서도 패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여 모든 기반을 거댈 냈다. 결국 원수처럼 여기던 원소를 의지하려다 [[조조]]에게 저지당하고 꿀물도 못쳐마시고 객사하였다.
== 생애 ==
=== 명문 원가의 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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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력 확장과 칭제 ===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조홍 (삼국지)|조홍]]으로 하여금 헌제를 맞이하려하자 장노(萇奴)를 보내 방해하는 한편<ref name='환관 자식' /> [[서주 (중국)|서주]]목 [[유비]]와는 [[회수]]를 사이에 두고 [[하비국]] [[쉬이 현|우이현]](盱眙縣)과 회음현(淮陰縣) 일대에서 다투었다.<ref name='듣보잡'>《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ref> 당시 [[여포]]가 유비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동탁]]을 주살한 것과 [[연주 (중국)|연주]]에서 [[연주 공방전|조조와 싸운 것]]은 치켜세우고, 듣도 보도 못한 유비는 여포의 위령에 힘입어 무찌르겠다고 회유하였다. 거기에다 군량 조달도 약속하였다. 여포가 이에 응해서 유비의 뒤를 쳐 하비를 탈취했다. [[광릉군]] 해서현(海西縣)까지 쫓긴 유비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여포에게 귀의하고 소패(小沛)에 발붙였다. 여포가 이를 허락한 이유는 원술이 조달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술은 유비를 마저 정리하려고 [[기령]]에게 3만 명을 줘 출전시켰으나 여포가 중간에서 제지하였다.<ref name='여포ㅅㅂㄻ'>《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ref> 강동은 손책이 [[회계군]]까지 평정하였다.<ref>《자치통감》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원년</ref>
[[197년]] 기어이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중 (후한)|중]]'''(仲)이라 하였다. [[구강군|구강]][[태수]]를 회남윤(淮南尹)으로 승격하고 공경백관(公卿百官)을 두었으며 천지에 [[제사]]지냈다. 이를 간하던 손책은 [[독립]]하였다. 원술은 여포에게 [[한윤 (후한)|한윤]]을 사자로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그 [[딸]]을 데려갔다. 이전에 원술과 여포는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었다. [[패국]]상 [[진규]]는 이 동맹이 [[중국]]에 국난이 될 것이라 보고 여포를 말렸다. 여포도 원래 원술을 싫어했던 터라 이미 길을 나선 딸 일행을 돌려세우고 한윤은 붙잡아서 [[허도]]로 압송하였다.<ref name='여포ㅅㅂ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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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과 유랑 ===
[[199년]] [[여름]],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궐]]을 불사른 뒤 첨산(灊山)으로 갔다. 첨산에는 원술의 수하인 [[진란]]과 [[뇌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바람에 더더욱 곤궁에 빠지고 사졸들은 흩어졌다.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원소 (후한)|원소]]에게 편지를 썼다. “[[한나라]]는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권신의 가문이 정사를 행하며 영웅호걸들은 서로 강역을 나눠 각축을 벌이고
원소는 내심 그 말이 옳다 여겼다. 청주[[자사 (관직)|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하였다. 원술은 [[하비]]를 통해 청주로 가려했으나 조조가 [[유비]]와 [[주령]]을 파견해 가로막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다.<ref name='환관 자식' /> 6월, 수춘이 80[[리]] 남은 강정(江亭)에 이르렀는데 [[식량]]은 맥곡 가루 30곡만이 남았다. 더위가 한창이어서 [[꿀]][[물]]을 찾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평상에 걸터앉아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라고 한참이나 탄식하다가 [[혈액|피]]를 한 [[말 (단위)|말]]가량 토하고 분사하였다.<ref>[[위소]] 등, 《오서》(吳書)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원술에서 인용</ref> 원술의 남은 일족은 [[여강군|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다가 손책이 여강군을 정복하면서 손책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딸은 [[손권]]의 측실이 되어 [[원부인]]이라 불렸으며, 아들 [[원요]]는 낭중에 임명되었다. 원요의 딸은 손권의 오남인 [[손분 (자양)|손분]]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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