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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uyi-Manchukuo.jpg|200px|섬네일|오른쪽|만주국의 명목 상의 군주였던 [[푸이|선통제 푸이]]]]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ref name="빅스_271">빅스, 271쪽 ~ 281쪽.</ref> 쇼와 천황은 이 만주 사변을 묵인했으며 때때로 [[관동군]]의 중국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라 다케지가 1931년 9월 22일에 쓴 일기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하야시의 통수권을 침해한 침략 행위를 묵인했으며, 10월 1일에는 참모총장과 관동군 사령관에게 “육군 형법을 위배했다”며 가벼운 징계만을 내리는데 그쳤다.<ref name="빅스_271"/> 쇼와 천황은 10월 8일에 관동군의 [[진저우]] 공중 폭격을 재가했다. 진저우 공습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도시 폭격이었다.<ref name="빅스_271"/><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1010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10-10&officeId=00020&pageNo=1&printNo=3877&publishType=00020 일본군, 랴오닝 성의 새 근거지 진저우 폭격 개시]<!--번역-->, 동아일보, 1931년 10월 10일.</ref> 10월 24일, 중화민국의 호소로 열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이사회 특별위원회는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스팀슨]]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중화민국에 [[켈로그-브리앙 협정조약]]을 발동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군에게 11월 16일까지 만주의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도의적 결의를 가결했다.<ref name="빅스_271"/><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1024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10-24&officeId=00020&pageNo=1&printNo=3891&publishType=00020 국제 연맹, "11월 16일까지 일본은 만주 철병 완료하라"], 동아일보, 1931년 10월 24일.</ref> 해외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으나,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문, 라디오, 연예계, 제국재향군인회, 극우 단체 등이 불안 심리를 조장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관동군을 지지하고 서양과 중화민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강해졌다.<ref name="빅스_271"/><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102700209201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10-27&officeId=00020&pageNo=1&printNo=3894&publishType=00020 소련, 방송 통해 "이번 만주 사건은 세계 대전의 발단…"]<!--소비에트 연방(노농정부)이 접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하얼빈 방송을 통해 선전 방송을 보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27일.</ref>
 
11월 6일,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은 장제스 국민정부와의 협상 계획을 파기함을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으며<ref name="빅스_271"/> [[시차 (정치인)|시차]](熙洽)를 비롯한 남만주의 기득권층 등이 일본을 지지했다.<ref name="빅스_271"/> 그 후 시데하라는 마키노 노부아키, 사이온지 긴모치, 새로이 [[조선총독부|조선 총독]]이 된 우가키 가즈시게에게도 이 방침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ref name="빅스_271"/> 한편 쇼와 천황은 11월 5일에 [[가나야 한조]] 참모총장에게 위임명령권을 내려 가나야가 관동군의 작전과 용병(用兵)에 관한 것들을 결정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ref name="빅스_271"/> 11월 23일, 시데하라는 미국의 [[AP 통신]]에 거짓 성명을 내보내, 만주 사변에 발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나라도, 일본군이 만주 북부의 [[하얼빈]]과 [[치치하얼]]을 점령하게 된<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1120002001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11-20&officeId=00020&pageNo=2&printNo=s1&publishType=00030 치치하얼 점령, 그 후], 동아일보, 1931년 11월 20일.</ref> 원인을 제공한 나라도 모두 중화민국이라고 밝혔다.<ref name="빅스_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