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전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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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왕→유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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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ate of Zhao 300 BCE.png|320px|섬네일|오른쪽|[[기원전 300년]]의 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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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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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다. 당시 중국에는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형태였고 말을 타고 싸우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싶었다. 이에 실행하고자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혔고 말에 직접 걸친 훈련하였다. 조나라의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하였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자식의 혜문왕에게 물려주고 주부(主父)라고 자칭하였고 실질에 부합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 章]의 후계 다툼이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하여 무령왕이 유폐되었고 뒤에 굶어죽었다. 조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秦)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이 되었다. [[인상여]]
장평 전투 이후에는 군사상 쇠퇴한 조나라이만,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다. 유명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名家)를 대표하는 인재인 공손룡과 음양가를 대표하는 인재인 추연이 있었다. 그리고 조나라 출신의 학자로는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虞卿),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劇子), 종횡가, 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龐煖)이 있으며,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었다. 장평 전투에서 패배한 효성왕도 유학자 [[순자]]
유목왕 때에는 흉노에서 국경선을 지킨 명장 [[이목 (조나라)|이목]]
== 역대 군주 ==
=== 삼진 분립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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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수 !! 시호 !! 휘 !! 재위 년수 !!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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