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64번째 줄:
 
==== 경양군 처형과 좌천의 진위여부 ====
이후 어릴 적 친구였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는다. 선조 수정실록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을 때,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자신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수감되었다. 이에 명종은 송강에게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격이 결백하고 강직한 정철은 왕족이라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양군 부자를 계속 규탄, 탄핵하여 경양군 부자를 사형시켰다. 화가 난 명종은 이후 그를 피하였다고 선조수정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기록인 명종실록에 따르면 해당 사형을 주장한 것은 우부승지 윤두수였고, 정작 정철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외에도 선조수정실록에는 이 일로 파면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명종실록에 따르면 정철은 그뒤로도 빠르게 승진해 병조참의까지 맡고 명종이 죽을 때 즘에는 홍문관 부교리까지 승진해 명종실록의 편수관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수정실록의 경양군 이야기는 크게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이다. 그 뒤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 예조의 정랑을 두루 지내고 [[1565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나갔다.
 
이후 [[홍문관]]수찬·좌랑·종사관·[[홍문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66년]]초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해 1월에 형조정랑으로 재직 중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석방과 사면을 건의하였으며, 그해 3월에 인종의 귀인이었던 맏누이의 상을 당해 곡을 하였다. 이후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고 동년 9월에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하였다. 북관어사로 순행하는 도중에 우연히 시조 한 수를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명종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하여 오래도록 화제가 되었다. 10월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