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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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년]](현종 13) 증산동의 지대가 낮아 물난리로 흙다리가 위험해지는 등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기고,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巖里)라 하였다.<ref>이건에는 하서 증손 김형지(金亨祉), 외현손 이실지(李實之)를 비롯하여 박승화(朴升華, 기정연(奇挺然) 등이 주도하고, 장성부사 송시도(宋時燾)의 협조 하였다.</ref> <ref>사우(祠宇) 상량문(上樑文)은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 이건 고유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봉안 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ref>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추배(追配) 하였다.<ref>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上言)하였다.</ref> [[1871년1796년]](고종정조 820) 하서 [[흥선대원군김인후]]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문묘]]에도 훼철되지종사(從祀)하고, 않은시호(諡號)를 전국의「문정(文正)」으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개시하였다.<ref>이는 [[필암서원]]이 [[호남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김인후]]라는 배향 인물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ref>이는 [[필암서원]]이 [[호남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김인후]]라는 배향 인물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
[[1796년]](정조 20)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1975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에 지정되었다.<ref>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 필암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4월 23일 해지되었다.</ref>
 
[[1796년]](정조 20)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1975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에 지정되었다.<ref>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 필암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4월 23일 해지되었다.</ref>
 
[[2008년]] 유물전시관 원진각(元眞閣)을 준공하고, [[2010년]] 교육공간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하였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