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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효종 10) 3월 [[전라도]] 유생(儒生)들의 소청(疏請)으로 '''필암'''(書院)이라 윤허(允許)를 입었다.<ref>[[1658년]] 사액을 청한 전라도 유생으로는 오희길(吳希吉)의 종질 함평현감 오이익(吳以翼)을 소두( 疏頭)로, 진사 김홍서(金弘緖) 등을 말한다. 함평현감 오이익은 창평현 예문관검열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자, 도암 오희길(吳希吉)의 종질이다. 진사 김홍서는 옥과현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김취수(金就修)의 아들이다.</ref>
 
[[1662년]](현종 3) [[조선 현종|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하였다.<ref>사액은 [[1659년]] 3월에 내려졌으나, 실제 선액(宣額. 임금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 편액을 하사하는 것)은 [[1662년]] 2월 예조정랑(禮曹正郞) 윤형계(尹衡啓)을 보내어 유제(諭祭)하였다.</ref> 이후 사액(賜額)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ref>[[1669년]](현종 10) 시호(諡號) 「문정(文靖)」이 내려졌다.</ref>
 
이름을 [[필암서원|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 맥동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인 『筆巖』이 각자되어 있다.<ref>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한다.</ref>
[[1672년]](현종 13) 증산동의 지대가 낮아 물난리로 흙다리가 위험해지는 등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기고,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巖里)라 하였다.<ref>이건에는 하서 증손 김형지(金亨祉), 외현손 이실지(李實之)를 비롯하여 박승화(朴升華, 기정연(奇挺然) 등이 주도하고, 장성부사 송시도(宋時燾)의 협조 하였다.</ref> <ref>사우(祠宇) 상량문(上樑文)은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 이건 고유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봉안 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ref>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추배(追配) 하였다.<ref>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上言)하였다.</ref> <ref>[[1796년]](정조 20)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ref>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ref>이는 [[필암서원]]이 [[호남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김인후]]라는 배향 인물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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