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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옥란]](卞玉蘭, 1322년 ~ 1395년) : 1346년([[고려]] [[충목왕]] 2년) 액정내시(掖庭內侍)를 거쳐 예빈시승(禮賓寺丞)에 보임되었다. 1360년(공민왕 9) 진주판관을 지낸 뒤 전법정랑(典法正郎)이 되어 전라도안렴사로 파견된 바 있고, 1372년수원부사가 되었다. 1375년(우왕 1)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에 이어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를 지내고, 충주(忠州)·청주(淸州)의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호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6263&cid=46621 변옥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 [[변중량]](卞仲良, 1345년 ~ 1398년) :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로,부친 변옥란과 함께 개국공신이며 정몽주의 문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密直使)를 지냈다. 1395년(태조 4) 이회(李薈) 등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의 독직을 비판하다 전중경(殿中卿)의 관직이 박탈되었으나, 그해 복직되었다. 139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참살당하였다. 시(詩)에 능하였으며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흥선대원군때 신원돼 이조판서에 추증됨. *참살후 후손들,역관( 중국어,일본어, 외교)과 내의원, 무역상등 전문분야(중인영역)활동,변승업,정3품 당상관,거부 축적(장희빈 외숙).
*[[변계량|*변계량]]([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97215 [卞季良]], 1369년 ~ 1430년) : 조선 개국 공신 변옥란의 막내 아들로,중량이 친형.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변계량(卞季良) 태종 세왕자들(세종포함)의 스승, 집현전 대제학],고려 사마시에 이어 조선 문과에서도 장원급제후(권람의 추천), 진덕박사, 사헌부시사, 성균관학정, 예문관의 응교, 직제학, 예조우참의, 예문관제학,예조판서, 참찬, 판우군 도총제부사를 지냈다. 변계량은 세종의 책사로, <*[[집현전]] 설치>와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고,<*공정한[[과거제]]>를 운영했는데, 이로 인해 명문 사대부의 조롱과 비판이 쏟아졌다. 집현전을 통해,세종에게 변계량 자신을 비롯한 조선의 브레인 그룹을 연결시켜 세종이 수많은 업적을 이뤄내는 체계를 이뤘다. 특히 변계량은 조선시대*대제학을 20여년 지낸 당대 최고의 학문 권위자로, 외교 문장으로써 명나라(문치주의 전성기,주희 성리학 채택)와 사대교린해 조선 건국혁명 정당성과, 명에 대한 공물 중 금,은을 제외해달라는 글을 지어 면제받고, 조선 건국 이념인 유교사회 건설을 전파하는데 쓰였다.
대제학은‘학문을 저울질하여 올바르게 평가한다'고 했으며 학문과 관련되는 모든 관직을 거친 대과 급제자만 오를 수 있었다. 또한 국가 시책이나 통치 철학을 학문에 반영하는 역할을 했다. 권력이나 이권하고는 무관한 학문을 다루는 최고 직책 대제학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선망의 대상으로“정승대상으로,“정승 10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품계는 정2품으로 판서와 동급이지만 정승이나 판서보다 높게 대우 받았다. [[조선 전기의 문학|화산별곡]]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04887 춘정집] 등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4551 다수]가 전해진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 중에서 “앞으로는 본전(사무실)에 출근하지 말고 오로지 집에서 글을 읽어라”고 명한다.한 가지 조건은, 세 사람이 글을 읽는 규범은 변계량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태종이 무인정사때 형 중량을 참살했는데도, 계량은 뛰어난 문재로 '태종실록'과 집현전 등 중용됐는데, 사람과 물질에 무척 공정,정확,청렴해, 세종의 능력중심 인재등용 원칙에 의한 것이고, 아내 권씨의 부정과 가출, 이혼 등 가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TV-친누이 존재는 미확인; 양녕대군을 품행문제(치정)로 폐세자시켜 버린, [[조선_태종|태종의 세왕자]] 전부의 스승이란 점을 놓고 볼때, 친누이(직계)관련 추문은 사실이 아니며(다른 내용의 문서확인), 태종때 대다수의 외척과, 공신 집안간 정적 제거 과정에서의 빌미가 와전된 걸로 추정)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변계량(卞季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