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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신념 ==
=== 동양평화론 ===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ref name="동양평화론">배영대, [http://news.joins.com/article/752/3838752.html?ctg=1000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관점서도 선구적 사상” ]{{깨진 링크|url=http://news.joins.com/article/752/3838752.html?ctg=1000 }}, [[중앙일보]]</ref>
 
====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
{{출처|날짜=2007-6-5|[[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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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 =====
 
 
 
안중근은 1894년 16세 나이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그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동학군을 "'동학당'(현 일진회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구실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달했었다(이때가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로,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가 개전하게 된 원인을 만든 병균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어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ref>안중근, <안중근 옥중 자서전>(2019, 열화당 영혼도서관), 22~23쪽.</ref>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안중근의 부정적 시각은 생애 말년 옥중에서 쓰던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ref>인용한 안중근, <안중근 옥중 자서전>, 111쪽.</ref>
 
안중근은 대한제국 멸망 원인에 대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민영익을 비롯한 고위 층의 무책임한 처사, 일제의 강도짓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서도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동학군을 '좀도둑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돌린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안중근은 조선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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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및 유묵 ==
[[파일:Ahn's Taegukgi.png|오른쪽|섬네일|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