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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통감부|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하얼빈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군|해주부]] [[수양산 (황해도)|수양산]] 아래에서<ref name="안중근의사 기념관"/> [[진해군|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ref name="oh227">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7쪽</ref>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ref name="oh227"/>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ref>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8, 173~174페이지</ref>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ref name="oh22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2쪽</ref>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ref name="oh222"/>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ref name="oh223">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3쪽</ref> 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ref>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 1999) 450, 463페이지</ref>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ref name="oh223"/>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ref name="oh223"/>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33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33 |date=20150402201143 }}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초기 활동 ====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ref>안중근,《안응칠역사》(1910)</ref>
 
=== 소년기 ===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가짜 동학 농민군들이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가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출처}}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가짜 동학 농민 운동|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천주교 입교 ====
안중근의 집안은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ref>웅진위인전기《안중근》/[[웅진출판]].</ref>,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 청인 난타 사건 ====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ref name="sibi1">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56쪽</ref>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ref name="sibi1"/>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ref name="sibi1"/>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ref name="sibi1"/>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ref name="sibi1"/>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ref name="sibi1"/>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
====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
[[파일:Ahn Joong Keun 1908.jpg|섬네일|오른쪽|190px|안중근, 만주에서]]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 독립운동 투신 ====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 의병 활동 ====
[[파일:안중근.jpg|섬네일|왼쪽|170px|안중근]]
 
[[1907년]](융희 1년) [[대한제국 고종|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ref name="daum">[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3258b daum]</ref>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ref name="daum"/>)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ref>풀어준 일본군 포로들이 이들의 경흥 작전을 누설한 것이다.</ref>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
==== 이토 히로부미 저격 ====
{{본문|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ref name="chosun1">{{뉴스 인용
|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3/2008102301669.html
| 제목 = 열 걸음 앞 이토에 3발 명중… 러시아어(語)로 "한국 만세!" 3번 외쳐
| 뉴스 = 조선일보
}}</ref>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2</ref>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FN M1900|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ref>당시 그는 이토 일행이 모두 비슷한 옷을 입어 이토를 알아보지 못해 거사를 실패할 뻔했지만, 갑자기 이토가 멈춰서 뒤돌아 군중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틈을 타 저격을 성공할 수 있었다.</ref>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으며, [[일본군]]장교를 총격하였다.<ref name="chosun1"/>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인용문2|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ref name="chosun1"/>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인용문|'''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br />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 마지막 행적 ====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0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28/2008052801905.html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실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 유언 ====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uJQdM8lrZJc YouTube - Broadcast Yourself<!-- 봇이 따온 제목 -->]</ref>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인용문|'''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ref>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http://www.hungryboarder.com/zboard/zboard.php?id=09_hungry_trans&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780 펀글게시판<!--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hungryboarder.com/zboard/zboard.php?id=09_hungry_trans&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780 }}</ref>}}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