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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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429년에 스코틀랜드군은 그 유명한 [[오를레앙 공성전|오를레앙 해방]] 당시에 [[잔 다르크]]를 도우러 오기도 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프랑스의 국왕의 친위 부대 [[가르드 에코세즈]]에 복무하기도 했다. 프랑스로 향한 많은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그곳에 정착하기로 택했다. 일부 장교들은 프랑스내 작위와 땅들을 부여받기도 했다. 15-16세기에 그들은 자연적으로 프랑스화가 되었다.<ref name="naturalisation" />
[[파일:Francois Second Mary Stuart.jpg|thumb섬네일|left왼쪽|[[메리 (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프랑수아 2세|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의 혼인으로 잠시 올드 동맹이 부활했었다.]]
15세기 남은 세월 동안 올드 동맹은 공식적으로 네 차례 재개되었다.<ref name="Cussans" /> 백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승리와 [[장미 전쟁]]에 따른 잉글랜드의 혼란은 잉글랜드의 위협이 크게 줄어든 것을 의미했고, 추가적으로 동맹은 거의 쓸모없는 상태가 되었다. 장미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올드 동맹이 참여하는걸 막아내지 못 했고, 그들은 요크 가에 맞서는 랭커스터 가를 지원하는 대가로, 많은 요새들과 [[저지 섬]], 잉글랜드 북부의 [[베릭어폰트위드]] 같은 일부 영토를 얻는 이득을 보았으며, 전쟁에서 요크 가의 승리와 그들이 그들에게 준 영토를 다시 되찾으려 함에도, 이들은 요크 가의 통치에 저항하는 이들을 지원했고, 심지어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마지막 랭커스터 가 출신 [[헨리 7세]]를 지원했다. 16세기 초에 잉글랜드의 평화의 신호로서 헨리 7세의 딸들인 [[마거릿 튜더]]와 [[제임스 4세]], [[프랑스 왕비 메리 튜더|메리 튜더]]와 [[루이 12세]]의 혼인은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에게 마침내 좋게 끝나는거처럼 보였다.
 
공식적으로 검토된 1512년에 동맹은 극적인 부활을 겪었다 (1517년과 1548년에 다시 이뤄짐). 그 두 차례의 동맹은 곧 없어졌지만 [[스코틀랜드]]는 1513년 [[플로든 전투|플로든]]에서 [[제임스 4세]]와 귀족 대부분이 사망한 후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15세기 전체 기간에 잉글랜드-프랑스,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분쟁은 계속되었지만, 올드 동맹을 이끌어낸 확실성은 사라졌다. 스코틀랜드 일대에서 생긴 [[개신교]] 측은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와의 친밀한 관계를 선호했다.<ref name="Cussans" />
 
1558년 두 왕국 사이의 올드 동맹은 [[메리 (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이 장차 [[프랑수아 2세|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함으로서 마지막으로 재건했지만, 1560년까지만 지속됐다.<ref>{{저널 인용| author-first= Eric | author-last=Durot| title=Le crépuscule de l'''Auld Alliance''. La légitimité du pouvoir en question entre Ecosse, France et Angleterre (1558-1561)| work= Revue d'histoire moderne et contemporaine | year=2007 | issue=1| pages=3&ndash;463–46 | url= http://www.cairn.info/article.php?ID_ARTICLE=HES_071_0003&DocId=43872&hits=21+}}</ref> 1568년에 메리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한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위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6세]]에 의해 개신교 국가로 바뀌었다.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그의 열망은 동맹의 필요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맹이 결성된 지 250년도 더 지난 1560년대에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공식적 조약들은 [[에든버러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ref>Macloed, Morag. France: the 'Auld Alliance' in The Oxford Companion to Scottish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1.</ref>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과 함께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국가임을 선포했고,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맺었다. 종교 개혁 기간에 개신교 [[신자들의 군주]]는 올드 동맹을 부정하고 프랑스의 섭정 [[마리 드 기즈 (1516년)|마리 드 기즈]]에 맞서 [[버윅 조약 (1560년)|버윅 조약]]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개했다. 2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위그노 전쟁]] 동안에 프랑스 국왕에 맞서며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 [[위그노]]들을 도우러 1562년 노르망디에 보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르드 에코세즈]]는 1830년 [[샤를 10세]]가 퇴위할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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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 ==
[[파일:Free French House plaque, Regent Terrace, Edinburgh.jpg|thumb섬네일|120px|left왼쪽|"La plus vieille alliance du monde"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
1942년 6월 에든버러에서 한 연설에서 [[샤를 드 골]]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동맹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는 또한 그것에 대해 묘사하길:<ref>{{서적 인용|title=Mémoires de guerre: L'appel, 1940-1942 |last=드 골 |first=샤를 |authorlink=샤를 드 골 |coauthors= |year=1960 |publisher=Plon |location=Université de l'État de Pennsylvanie |isbn= |page= |pages= |url= |accessdate=}}</ref>
<blockquote>"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한 다섯 세기 동안의 모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과 항상 한편에서 싸웠고, 프랑스인들은 이런 우애를 지닌 여러분들보다 더 휼륭한 이들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blockquote>
1995년에, 양 국가에서 동맹이 시작된지 700주년을 기념한 행사가 열렸다.<ref name="wiley"></ref> <br>
 
2011년에, 영국의 역사가 쇼반 탤벗 (Siobhan Talbott) 박사는 이 주제를 다룬 연구 결과를 출판했고 올드 동맹이 깨진적이 없었다는 결혼을 내렸다.<ref>{{웹 인용|url= http://www.manchester.ac.uk/aboutus/news/display/?id=7313 |title= In a paper to be published next year, Dr Siobhan Talbott argues the Franco-Scottish Auld Alliance of 1295 survived centuries of enmity and war between Britain and France – even after the Act of Union was signed in 1707.|accessdate=2011-11-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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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주제}}
 
[[분류:올드 동맹| ]]
[[분류:1290년대 조약]]
[[분류:13세기 군사 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