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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p3.png|섬네일|1944년 10월 1일 미군에 의한 버마 미치나의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보고서 페이지 3]]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1-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적 구를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이른바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 및 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전선으로 수송하여 성노예 역할을 강요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던 조선의 누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ref>[http://joongang.joins.com/article/684/17736684.html?ctg=1000&cloc=joongang|home|keywordnews “위안부 속여서 끌고가는 것 직접 봤는데 꾸며낸 일이라고?” … “사설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라” … JP, 와타나베 사장 호통쳤다] [[중앙일보]] 2015.05.06</ref> 일본군이 영내에 설치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끌고 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았는데, 이를 자기들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위안부란 말도 실제로는 완곡어법에 불과했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노예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여성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끌고 가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고 모집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성매매를 시킨다고 고지한 후에 데려갔다고 하더라도 위안부자체는 심각한 인권 유린이다. 절도를 할때 모르게 절도를 하는 것과 위협을 하여 알게 뺏는 강도의 차이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다고 한다.
 
성노예 여성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국으로서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가 관련당사국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것에 비해, 위안부는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 온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잘못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질타를 받기도 하다가, 나중에나 진실이 밝혀지고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 등을 포함해서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기에 지금도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심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있다. 일본 측의 입장은 크게 3가지로서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문서상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일보]] 등의 기사 보도에 의하면 월 300원에서 최고 3천원 이하의 수당을 준다고 보도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