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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gasakibomb.jpg|섬네일|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 [[팻 맨|팻맨]].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원자 폭탄 투하는 [[일본의 항복|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으며, 대전을 종결지었다. 대전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전사(前史)로 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초기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樞軸國)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즉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폴란드 침략]]으로 시작된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전격작전 아래 순식간에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고, 이탈리아도 독일을 편들어 참전하였다. 조기 승리를 목표로 한 독일군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여 1941년 6월에는 소련으로 침입했다. 한편 아시아 지배를 노리는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을 기습([[진주만 공격]])하여 여기에서 전세계를 휩쓸어 넣는 대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추축국측의 단기결전 계획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실패, 소련의 완강한 저항, 물량(物量)이 풍족한 미국의 참전으로 좌절되어 유럽에서는 1943년초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승리를 계기로 전국(戰國)이 점차로 [[연합국]]에 유리해졌다. 아시아에서도 강렬한 중국의 대일(對日)항전, 태평양에 있어서 미군의 반격 앞에 일본군의 후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더욱이 유럽의 서쪽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동쪽에서는 소련군의 맹추격을 만나 1945년 4월 베를린이 함락되자 독일도 항복해 버렸다. 고립된 일본 또한 동년 [[일본의 항복|8월 15일]]에 항복하여 드디어 미증유(未曾有)의 대전도 연합국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대전의 성격은 극히 복잡·다양한 계기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의, 각기 그 주변의 약소 국가나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며, 피침략국측에서 말하면 민족 방위 또는 광복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남아시아 침공에 대한 각국의 저항 투쟁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로 식민지 침략과 영토 확장을 지향하는 추축국과 해외 시장 개척과 아울러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연합국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셋째로 독·소전을 계기로 미·영·불과 소련의 동맹, 나아가서 중국 및 기타 피침략 민족국가들이 동맹을 형성하였는데,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즘 국가들이 이들을 침략하자 전세계에서 반파시즘 세력이 구축되어 벌어진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으로 볼 때 이 대전의 성격은 반파시즘 전쟁이며 반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세력이 가장 진지하게 싸운 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 진영 대 전체주의적 파시즘 진영의 대결이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팽창을 사이에 둔 이른바 ‘세계 재분할(世界再分割)’이란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1929년부터 1933년의 세계공황은 자본주의 국가를 뿌리째 흔들어 놓아 블록 경제 체제의 강화와 보호무역 체제의 격화는 자본주의 열강(列强)의 대립을 날카롭게 하였고, 한편 그 경제권이 협소하고 경계 기반이 취약한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있어서는 공황의 타격이 의외로 심각하여 각기 국내 모순의 활로를 세계 재분할, 즉 대외침략에서 구하여 스스로 ‘갖지 못한 국가’라 칭하며 ‘가진 국가’인 미국·영국·프랑스에 대한 도전을 노골화하고 그 공격의 유효화와 국내 경제 악화의 해결이란 일석이조의 이점을 얻으려고 군비확장을 급속히 진전시켰던 것이다. 또한 미국·영국·프랑스에서도 경제공황의 타격은 컸고 실업률은 매우 높았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예민해지고 사회 불안도 증대하여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갈 길이 막힌 정세 하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열강들간에 재차의 세계 분할을 위한 패권 다툼이 대전을 유발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