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 (법조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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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전라북도]] [[김제시|김제]]에서 태어난 김홍섭은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1941년 4월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단발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변호사는 자유업"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서울지검 검사에 임명되어 조재천 검사와 함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을 수사했다. 하지만 이내 사직하고 [[뚝섬]]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어찌 자신의 고민에만 집착하고 있겠느냐"는 호통에 결국 1946년 12월 다시 법조계로 돌아왔다.
 
이후 판사 생활을 하다가 1961년 12월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주요 형사사건 재판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경주호를 납치해 이북으로 가기 위해 난동하고 살인했던 경주호 납북기도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5분 가량 머리를 숙이고서는 곧이어 피고인들에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재판장석에 앉은 나와 피고인석에 있는 여러분 중에 누가 죄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고 말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22900209205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2-29&officeId=00020&pageNo=5&printNo=19202&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84년 12월 29일자]</ref>
전주지방법원장,대법원 판사, 광주고등법원장을 역임하고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 중이던 1965년 3월 16일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그 전에는 불교를[[불교]]를 믿었으며 나중에 불교에서 [[개신교]]([[감리교|감리회]])로 첫 개종하였다가 결국 개신교(감리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마 가톨릭]]으로 최종 성향 개종하였다. 방한암, [[최남선]], 김일엽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시집 '무명' 등 2권과 '창세기초', '무상을 넘어', '하야장', '성좌도'라는 수필집을 펴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22800209209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2-28&officeId=00020&pageNo=9&printNo=1920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84년 12월 28일자: 무상을 넘어서 김홍섭씨]</ref> 작품에서 "기본적 인권은 민족의 이익보다 높다고 믿는 것이 법관으로서 내 신조이다"라고 적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60700329105007&edi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5-06-07&officeId=00032&pageNo=5&printNo=15446&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5년 6월 7일자]</ref>
== 사후 평가 ==
사망한지 1주년이 되는 1966년 3월 16일 김홍섭의 사직동 자택에서 박귀훈 신부의 집전으로 재야, 재조 법조인들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했다.<ref>경향 1966월 3월 16일자</ref> 1995년 사법 100주년을 맞아 언론에서 법관 350명을
== 각주 ==
<references />
 
{{토막글|법학|정치인}}
 
[[분류:1915년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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