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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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동문관(同文館)을 [[1867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 [[이홍장]]은 독일,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마건충]]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외국자본주의의 중국진출에 대항하여 양무파는 민족자본과 민간기업의 양성에 힘을 쏟아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독상판'(官督商辦)의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또한 [[이홍장]]은 중국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던 외국기선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기선 회사인 '윤선초상국'을 [[1872년]] 창립하였다. 또 1890년대초까지 [[타이완]]에 기융(基隆) 탄광, [[즈리성직례성]]에 개평(開平) 탄광, [[헤이룽장성]]에 막하(幕河) 금광, [[후베이성]]에 대야(大冶)철광을 열었고 방직공장도 각지에 건설하였다. [[1881년]]에는 중국최초의 [[철도]]가 당산(唐山)과 서각장(胥各莊)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 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매판자본가,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 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뒷날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양무운동의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