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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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이다. 여산 또는 역산(酈山)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 [[시안 시|시안]] [[린퉁구]] 원산원(驪山園)에 있는 야산에 위치하여 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시간이 지나며 그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76m라는 높이를 자랑한다. 진시황릉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매장실과 기타 부장품들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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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은 당시 진시황의 궁전을 그대로 축소, 복제한 모형이다. 거대한 봉우리가 중앙에 있고, 내성과 외성이 이를 차례대로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다. 또한 내성과 외성 안팎에 군데군데 점토로 구워 만든 병마용과 유물들이 묻혀있다. 내성벽 내부의 서쪽 부근에서는 청동 마차와 말들이 발견되었다. 내성벽 안에서는 황제들을 모시던 관리들과 행정 각료들의 모습을 본딴 인형들이 발굴되었다. 외성과 내성 안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희들과 광대들의 인형들이 출토되었다. 외성벽 북쪽에서는 황실 정원이 있었는데, 이 정원에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거위, 오리, 그리고 악사들의 모형이 발굴되었다. 외성 바깥쪽에서는, 말들이 산 채로 묻혀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진시황릉 서쪽에서는 이 능을 짓기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있었다. 병마용갱은 여산에서 약 1.5km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묻혀 있다.
 
아직까지 진시황릉의 봉우리는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를 발굴하기 위해 수많은 기술들이 연구되고 있다. 진시황의 지하 궁전이 봉우리 바로 아래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봉우리 아래에서 약 4m 정도의 높이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가로로 390m이고 세로로 460m였다고 한다. 이는 지하 궁전을 지탱하는 벽으로 추정되며, 벽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벽들의 사면에는 완만한 경사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 서쪽에 연결되어 있는 경사로에서는 청동 말들과 마차가 발견되었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 자체는, 동서로 80m이며, 남북으로 50m이다. 또한 그 높이는 약 15m정도이다. 다만 지하궁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약 20m에서부터 최대 50m까지 그 학설이 분분하다.
아직까지 진시황릉의 봉우리는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를 발굴하기 위해 수많은 기술들이 연구되고 있다.
 
과학자들이 실시한 연구에 의하면, 진시황릉 속에 묻혀 있던 대부분의 금속 구조물들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는 진시황릉에 설치된 안정적인 배수 시스템 덕분으로 여겨진다. 사마천의 기록에도 따르면, 진시황릉을 팔 때 지하수를 세 번이나 만났기 때문에 능을 잘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수 설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지하 댐과 배수 수로가 발견되었고, 지하궁전은 침수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에서 극도로 높은 수치의 수은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사기에 기록된 내용 중 '수은으로 하천과 강, 바다를 가득 채웠다'라는 부분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만약 지하궁전이 발굴되어 외부 공기에 수은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게 되면, 이 수은이 휘발하여 공기로 퍼져나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토양 검사를 할 때, 총 54곳에서 수은 검출 검사를 실시하였는데, 한 군데에서만 유독 1440ppm에 달하는 수은이 검출되었고, 나머지 53곳에서는 보통과 비슷한 205ppm에 근접한 수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은의 검출량이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산업 오염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는 학설까지도 나왔다.
 
2012년, 중국 고고학계는 진시황릉에서 거대한 '옛 황궁'의 터가 보존되어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가설에 의하면, 이 사각형 모양의 궁전은 길이가 690m, 너비가 250m로, 17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거의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크기와 비슷할 정도이다. 궁정에는 18개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고, 1개의 거대한 건물들이 이 18개의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2010년부터 이 터를 조사하여 벽돌, 벽, 성문, 도자기 파편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발굴 ==
1976년에 진시황릉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진시황릉은 중국 고고학계의 최대 관심거리들 중 하나였고 수많은 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언급하며 조사를 요구하였다.
 
* 진시황릉은 지진대 위에 서있고,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부장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 진시황릉을 발굴하면 관광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다.
*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빨리 발굴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아직 중국의 고고학 기술이 진시황릉과 같은 거대한 역사지구를 발굴하는 데에는 충분치 못하다며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시황릉과 인접해 있는 병마용갱만 봐도, 중국 고고학계는 병마용이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서 겉면에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던 색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따라, 진시황릉 발굴을 위해서는 일단 관련 기술과 조사가 선행되야 한다는 점을 공식 방침으로 내세웠고 이로 인해 진시황릉 주위에 있는 황손의 묘를 발굴 조사하는 것도 한시적으로 금지하였다.
 
==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