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45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0번째 줄:
두번째 이유는 훈족의 왕 아틸라가 45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것이다. 아틸라는 '신의 채찍' 이라 불리울 정도로 유럽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인물이다. 아틸라는 천재적인 군주로 뛰어난 훈족군사를 이끌며 동서로마와 모든 게르만 민족들이 상대하기 싫어서 피할정도로 전하무적에 가까웠다. 그런 아틸라가 453년에 복상사(腹上死) 한후 훈족들은 내분에 휩싸여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버렸다. 아틸라와 훈족이라는 앓던이가 빠져나갔는데 눈에 가시같은 아이티우스 정도는 없어도 된다는 판단을 내린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아이티우스가 과거 423년에 [[황제 호노리우스|호노리우스 황제]](395-423) 사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제등극을 반대했었던 구원(久怨)이 있었다. 당시 아이티우스는 참칭자 요한네스 옹립에 앞장섰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병사 6만명을 빌려와서 당시 4살이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대적을 하였던 전력이 있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황제는 423년에 즉위하지 못하고 2년후인 425년이 되어서야 황제에 자리에 오를수 있었다. 또한 이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으며 훈족병사들을 내세워 갈리아 지역의 군사령관직을 요구하였고 황실에서는 어쩔수 없이 수락했었다.
 
네번째 이유는, 452년에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고 북이탈리아를 유린하며 로마로 진격했지만 아이티우스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갈리아에 주둔할뿐 군대를 파병치 않았었다. 당시 황궁이 있는 라벤나와 로마는 함락당할 위급한 상황이였었다. 물론 교황 레오 1세등이 나서서 협상을 통해 아틸라와 훈족의 퇴각을 유도하여 잘 해결되었지만 황제로서는 서고트족등 아먄족으로 구성된 갈리아 군대가 원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출동하지 않은점은 용서하기 힘든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