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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년]] ~ [[1651년]])는 바이에른 공작(Duke of Bayern, [[1597년]] ~ [[1651년]])이자 바이에른 선제후(Elector of Bayern, [[1623년]] ~ [[1651년]])이다.
막시밀리안 대공
 
-大公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대공(1623∼1651). 1597년 바이에른 공령(公領)을 계승하였다. 이후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운동의 선두에 서고 160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諸侯同盟)에 대항해서 가톨릭 제후연맹(諸侯聯盟)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다. 30년전쟁 발발(1618) 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1620년 바이센베르크 싸움에서 팔츠 백(伯) 프리드리히 5세에게 인솔된 반란군(反亂軍)을 격파하고, 1623년 팔츠 선제후(選帝侯)의 자리와 상(上) 팔츠를 획득하였다. 황제가 발렌슈타인을 기용(起用)한 후는, 황제권력의 강대화(强大化)를 두려워하여 1630년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파면(罷免)시키고 자신의 지도적 지위 회복을 기도하였다. 스웨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불리한 형세에 놓이자, 1647년 울름에서 단독으로 강화(講和)하였다.
[[1597년]] 바이에른 공령(公領)을 계승하였다. 이후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운동의 선두에 서고 160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諸侯同盟)에 대항해서 [[가톨릭 제후연맹]](諸侯聯盟)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다.
 
-大公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대공(1623∼1651). 1597년 바이에른 공령(公領)을 계승하였다. 이후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운동의 선두에 서고 160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諸侯同盟)에 대항해서 가톨릭 제후연맹(諸侯聯盟)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다. [[30년전쟁]] 발발(1618) 후, 황제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를2세|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1620년 바이센베르크 싸움에서 팔츠 백(伯) 프리드리히 5세에게 인솔된 반란군(反亂軍)을 격파하고, 1623년 팔츠 선제후(選帝侯)의 자리와 상(上) 팔츠를 획득하였다. 황제가 발렌슈타인을[[발렌슈타인]]을 기용(起用)한 후는, 황제권력의 강대화(强大化)를 두려워하여 1630년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파면(罷免)시키고 자신의 지도적 지위 회복을 기도하였다. 스웨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불리한 형세에 놓이자, 1647년 울름에서[[울름]]에서 단독으로 강화(講和)하였다.
{{글로벌}}
 
[[분류:1573년 태어남]]
[[분류:1651년 죽음]]
[[분류:30년 전쟁]]
[[분류:바이에른 주]]
[[en:Maximilian I, Elector of Bava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