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학생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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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5월 30일]] 긴급조치법이 발효되면서 정부가 조직적인 시위를 금지하자 극좌 계열은 점차 지하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서독 정부가 [[1968년]] [[9월 22일]] [[독일 공산당]]의 창당을 허락하였으나 학생 운동 참가자들이 함께 살던 [[코뮌 (공동체)|코뮌]]을 수색하는 등 재야 세력과 극좌파의 움직임에 대해서 감시했다. 한편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을 방화하여 3년의 징역형에 처해진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가 1970년 출옥하여 무기, 자동차, 집, 자금을 조달하여 또 다른 폭력 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바더-마인호프를 결성한다. 안드레아스 바더는 다시 체포되어 [[모아비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황달]]로 인해 [[테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던 중 울리케 마인호프는 《[[콘크레트]]》(konkret)라는 좌파 잡지의 편집장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해 안드레아스 바더와의 [[공동 저술]]을 위해 사회문제연구소로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틈을 타 안드레아스 바더를 탈옥시켰다. 학생이나 재야의 운동에서는 한계가 있으며 투장투쟁만이 사회 전복의 꿈을 실현해줄 것이라는 취지의 선언서를 작성함으로써 [[독일 적군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다.<ref>{{harvnb|oh|2006|p=37|ref=oh}}</ref>
{{인용 상자|우리는 정치적이고 반문화적인 과정을 과소평가했고, 비합법적인 무장조직 외에 어떠한 정치·사회적 조직도 갖추지 못했다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어떤 길도 제시할 수 없었다|너비=330px |정렬= (기본값:right)|출처=적군파 해체 성명, 1998년 4월 21일 }}
[[1972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로 서독 내의 미국 군사시설을,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슈프링어]] 출판사를 공격했고 1975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독일 대사관을 점거했다 [[독일의 가을|1977년 가을]]에는 [[나치 친위대]] 출신의 전국경영인협회 회장이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했으며 [[독일의 법원|법원]]이나 [[법조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며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폭력 투쟁을 감행했던 것이다. 한편 적군파가 활발히 활동하던 1975년 독일 정부가 학생운동 전력자를 공직 채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6월에 반테러법을 연방 의회가 제정함으로써 극단주의자들의 행동 반경은 더욱 좁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70년대 말들어 독일학생운동에 참가했던 거의 대부분들이 이탈하고 소수만이 남은 조직으로 전락한 적군파는,<ref>{{harvnb|oh|2006|p=37|ref=oh}}</ref> 오른쪽과 같은 결론을 내리며 [[1998년]] [[4월 21일]] 자진 해산했다.<ref>{{harvnb|oh|2006|p=38|ref=oh}}</ref>
 
==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