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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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과 죽음 ===
이후 [[불가리아 제2제국]] 내정에 개입하여 [[이바일로의 난]]을 겪었으며 [[1281년]] [[나폴리의 카를로 1세|샤를]]의 사람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 4세|마르티노 4세]]는 미카일을 파문하고 샤를의 비잔티움 원정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샤를은 지난 번에 폭풍우로 괴멸한 육군과 해군을 증강하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고 베네치아, 반칸 반도의 군주들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대 비잔티움 동맹을 강화했다. 미카일은 이에 맞서 [[교황청]], 베니치아의 숙적 제노바, 그리고 만프레디의 사위인 [[아라곤의 페드로 3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수적으로 시칠리아에 열세였다. 그러나 뜻밖에 [[1282년]] [[부활절]] 시칠리아에서 샤를과 프랑스인들에 대한 반란인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샤를은 비잔티움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1282년]] [[12월 11일]] 미카일은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원정을 떠났다가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죽었다. 제위는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안드로니쿠스 2세]]에게 돌아갔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셀림브리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