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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37년]]([[도광제|도광]] 17년), [[직례]](현재의 [[하북성]] [[난피현|남피]])에서 태어났다. 1852년([[함풍제|함풍]] 2년)에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했다. 1863년([[동치제|동치]] 2년), 26세에 [[진사]]([[탐화]])로, 다음 해 1864년에는 [[한림원]] 편수, 문역각 교리를 역임했다. 1880년(광서 6년), [[서태후]]가 억지로 [[광서제]]를 옹립하자 관리인 오가독이 죽음으로서 충고했을 때도 [[서태후]]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며 눈에 띄게 되었다. 1881년(광서 7년)에 시독, 시강학사가 되었고, 다음 해에는 내각학사를 역임했다. 1880년대에는 산서순무, [[양광총독]], [[호광총독]]으로 승진하며, 주로 [[우한]]을 거점으로 [[부국강병]], 식산흥업에 노력했다.
 
 
[[1880년]](광서 6년), 북쪽 [[일리 지방]]을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과 협상을 통해 〈[[리바디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조약의 내용에 일리 지방의 대폭적인 이양과 경제 권한 등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의 전권대사 [[숭후]]의 엄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조정에 제출했다. [[청불전쟁]]에서 은퇴한 [[풍자재]]를 기용하였고, [[청일전쟁]]에서는 [[당경숭]]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을 지원하고 대만을 침략한 일본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는 등 강경한 주장이 눈에 띄었지만, 두 전쟁의 패배 후에는 대외에 유화적인 자세도 보였다.
 
저서로 《권학편(勸學篇)》, 《장문양공전집》등이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xinhuanet.com//politics/2018-06/22/c_1123018764.htm|제목=督鄂18年,张之洞推动第一次中部崛起 |뉴스=xinhuanet.com|날짜=2018-06-22}}</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