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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광서 16년), 매장지가 발견된 대야철광(大冶鐵鑛)의 개발을 독일과 함께 진행했다. 1893년(광서 19년), 자강학당 (이후 [[무한대학]])을 창립하고, 이듬해인 1894년에 자강군(이후에 [[원세개]]의 새로운 군에 편성)을 설립하고, 외국 차관을 통해 철도 부설을 추진하는 등 외국 자본과 연계한 국내 개발을 추진했다. 또한, 호북성, 호남성의 제품을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등 경제적 뒷받침을 하고, 화폐를 다시 주조하고, 독자적인 지폐 발행으로 한구를 중심으로 한 경제권을 만들어 냈다.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변법자강|변법운동]]과 정변 전후 광서 2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구에서 회담을 가졌다. 점진주의를 중시하는 이토와 의기투합했고뜻이 맞았고, 일본에서 코크스를 수입해 [[야하타 제철소]]에 필요한 철광석을 일본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권학편’에서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본받아야 하며,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일본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1909년]](선통 원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