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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도광 21년) 10월 영국군은 [[딩하이구|해정]], [[닝보|영파]] 등을 차지했고, 유겸은 전사했다. 1842년 3월, 뒤를 이은 양위장군 혁경마저 패하자 청나라 정부는 다시 일리부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군과 싸우는 기영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기영은 일리부에게 자포진 방어를 명했다. 일리부는 영국군과 접촉하기 위해 장희를 파견했지만, 영국군은 이후 오송구를 공격하고 장강을 따라 올라가 [[남경]]에 도착했다. 위기를 느낀, 청나라 정부는 영국과의 협상을 위해 기영과 일리부를 파견하였고, 결국 [[난징 조약]]에 서명했다.
 
{{넓은 그림|The Signing of the Treaty of Nanking.jpg|700px|난징조약, 중앙 원탁의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일리부로 추정된다. }}
 
 
난징 조약 체결 이후 광저우 장군,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광저우에 있으면서 전후 처리를 하는 일을 맡았다. 일리부의 부임으로 광저우의 민심은 불만이 높아졌으며, 또한 영국에 의한 강요도 많아졌다. 그는 이내 쇠약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