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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정}}
[[파일:Korea-Portrait of Kim Woomyung-Joseon 02.jpg|섬네일|오른쪽right|김우명]]
'''김우명보우명'''(金佑明, [[1619년]] ~ [[1675년]] [[6월 18일]])은 [[조선]]신ㄴㄻ성이퀴벡까제국의 후기의존엄하신 문신이자,현직 외척이다군주이시다. [[조선 현종|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로, 딸 [[명성왕후]]가 세자빈에 간택된 뒤 왕비에 오르면서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64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강릉참봉, 세마(洗馬) 등을 역임했다. 부친상과 현종 즉위 이후 [[1661년]] 영돈녕부사가 되고 이후 [[오위도총부]]도총관과 호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674년]],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자, 서인 내 한당(漢黨)파의 지도자로서 남인이었던 [[허적]], [[윤휴]], [[허목]] 등과 동조하여 [[산당]]인 [[송시열]] 등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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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파일:Korea-Portrait of Kim Yuk-Joseon.jpg|섬네일|오른쪽right|180px|아버지 [[김육]]]]
 
김우명은 [[1619년]]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 때 살해된 [[김식]]의 후손으로, 군자감판관을 지내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김비(金力)의 증손이자, 할아버지는 참봉 증 영의정 김흥우(金興宇)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증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된 윤급(尹汲)의 딸이다. 그는 뒤에 5촌 아저씨인 김지(金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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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명성왕후의 왕비 간택 ===
[[파일:Korea-Portrait of Kim Woomyung-Joseon.jpg|섬네일|왼쪽left|160px|김우명]]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649년(인조 27년) [[강릉]] 참봉과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를 지냈으며, 1650년 다시 강릉참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익위사 부솔(副率)등을 지냈다.
 
[[1651년]]에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었으며 1652년(효종 3년) 부솔,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 그해 [[승정원]]우부승지, 가주서 등이 되었다. 1653년에 평시서령(平市署令), 공조좌랑, 공조 정랑(工曹正郞) 등을 지내고 [[1654년]](효종 5년)에는 [[장악원]] 첨정(僉正)에 제수 되었다가 그해 겨울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냈으며 2년간 근무하였다. 1657년(효종 8년)에는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고 [[예빈시]]정(禮賓寺正)에 보직되었으며 1658년에는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부친 [[김육]]의 사망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마쳤다. 아버지 [[김육]]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서인]] 내 왕실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한당(漢黨)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 [[조선 효종|효종]]이 승하하고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하여 딸인 [[명성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자 [[1661년]](현종 2년) 삼년상을 탈상한 뒤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제수되었다. 또한 [[상의원]](尙衣院), [[사도시]](司導寺), [[장악원]](掌樂院), 빙고(氷庫)의 도제조직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다.
 
그는 본래는 [[서인]] 당원이었으나 [[송시열]](宋時烈)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의 아버지 [[김육]]의 묘소의 수도 문제로 [[송시열]] 등과 알력이 생겼다. [[1674년]],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 : 실성한 아버지 대신 손자가 상주가 된 것에 대한 대립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자 남인이었던 [[허적]](許積)에 동조하였으며 왕실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한당(漢黨)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때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이어 [[사옹원]]제조가 되어 장악(掌樂), 빙고(氷庫)등을 관장하였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 등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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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인과의 갈등 ===
[[파일:Kim Seokju.PNG|섬네일|왼쪽left|130px|조카 [[김석주]]]]
[[파일:김우명 추증 교지.png|섬네일|오른쪽right|김우명의 시호 교지 (1681년)]]
 
그 뒤 다시 영돈령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송시열과 같은 서인이었으나,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를 계기로 [[남인]]의 예론을 지지, 남인 온건파인 허적에게 동조, 협력하여 송시열 등을 공격하였다.
 
[[1675년]](숙종 1년) [[조선 인조|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과 [[복선군]], [[복평군]](이른바 삼복)이 숙종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고, 그해 [[2월]] 이들이 궁녀와 사통하였다,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모함하여 죽이려 한 이른 바 [[홍수의 변]]에 가담하였다가 남인인 윤휴, 허목 등과 계속되는 갈등을 빚었다.
 
{{인용문2|이 일은 선왕(先王)께서 놀라 근심하는 바이고 자성(慈聖, [[명성왕후]])께서 대처하기 어려운 바이니, 청컨대 은의(恩義)를 참작하여 왕법(王法)으로 처형해서 두려움을 알아 행동을 고치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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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강원도]] [[춘성군]] [[서면]] 안보1리(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산25-1에 매장되었고, 묘비문은 이민서(李敏敍)가 썼다. 행장은 조카 [[김석주]](金錫胄)가 지었다. 그의 묘소에서 가평을 지나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29-1번지에는 형 [[김좌명]]의 묘소와 후일 이장된 조카 [[김석주]] 등의 묘소가 있다. 김우명의 묘는 [[대한민국]]에 와서 그의 묘소는 강원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사후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f>박물관 속의 한국사(최형철 지음, 휴머니스트, 2008) 272 페이지</ref> [[1681년]](숙종 6년) [[12월 4일]] 충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숙종이 내린 시호 증시 교지는 후일 청풍부원군김우명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와 김우명영정과 함께 그의 12세손 김성구가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