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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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太平天国天朝宫殿模型 (4132349371).jpg|thumb|270px|천왕부]]
[[File:Heavenly throne (5811933470).jpg|thumb|270px|천왕부의 왕좌]]
[[File:Vault Protector Coin of Taiping Kingdom.jpg|thumb|270px|태평천국의 동전]]
 
남경에 입성한 후 태평천국은 즉시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먼저 천왕 홍수전 이하 오왕은 장내에 웅장한 궁전을 만들었으며, 홍수전과 양수청 것이 가장 컸다. 궁전을 축조한 이후 홍수전은 그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정무뿐 아니라 민중 앞에서도 멀어졌다. 때문에 정무는 양수청이 관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초기에 천경에서 입안, 실행된 정책은 양수청의 강력한 지휘 아래 행해진 것이다.
 
천경 주변을 지배했다고 해도, 청나라와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평천국의 사회 조직은 군사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고, 병농일치가 원칙이었다. 예를 들어 궐기 직후부터 남녀가 부부라고 해도 별도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천경에서도 그러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단지 천왕 이하 지도부는 예외였고, 서민은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면서 [[구약]]의 [[일부다처제]]를 이유로 다수의 처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중국 황제의 후궁 제도에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이러한 왕과 서민의 격차에 불만이 높아졌다. 1855년, 남녀를 갈라놓는 제도는 폐지되었고, 새로운 점령지에서만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