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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1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18세에 학문을 포기하고 산적에 가담했다. 1856년(함풍 6년), 그것과 관련되어 어머니가 자살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향용]]을 조직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참여를 고려하지도 않았고, 동시에 청군이 태평천국에 적극적인 개입하는 것에도 반대를 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1857년, 당시 [[여주]] 지현(知縣)의 토벌군 참여 요청을 거부해서 얼마간 투옥되었고, 이내 사면되어 [[이홍장]]의 [[회군]]에 들어가 태평천국 토벌에 참여했다.
 
[[1864년]]([[동치제|동치]] 3년), 부대를 이끌고 [[창저우시 (장쑤성)|창주|상주]]를 공격해서, [[진곤서]]를 포로로 잡는 군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직례제독에 임명되었고, 1867년에는 윤융하 전투에서 염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염군 작전에서의 공적으로 일등 [[남작]]에 봉해진다. 그러나 유명전이 [[베이징]]에 임관하자 [[정여창 (청나라)|정여창]] 등 다른 관인과의 관계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래서 유명전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비서서원을 세우고, 조상의 사당을 복구하는 등의 생활을 했다.
 
[[1884년]](광서 10년), [[베트남]] 종주권을 둘러싸고 [[청불 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유명전을 다시 기용했다.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에서 프랑스군의 상륙 작전을 여러 차례 저지했다. 또한 호미 전투(滬尾)의 승리로 프랑스군의 대만 상륙 계획을 결국 좌절시켰다. 이듬해 1885년에 [[청불 전쟁]]은 끝났다. 전쟁 중 프랑스 극동 함대에 의해 대만이 봉쇄되는 등 중국 동남부 연해 지역에서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이 밝혀졌다. 그래서 대만 통치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한 청나라 정부는 1885년 10월, 대만섬을 [[복건성]]에서 분리 독립시켜 [[대만성]]을 설치했고, 유명전을 초대 대만순무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