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김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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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한강하류의 나루터로 김포반도에 건너 온 북한군 일부가 김포에 침투하였다. 북한군에게 공격당해 1명이 전사했고 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오대위도 부상을 입는다. 뒤늦게 사령부에서는 이 상황을 알게 되었고 3대대의 즉각적인 김포 공격을 미해병 사단에 건의하였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새벽부터 진행 중이던 한강 도하작전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고 한국해병대 사령부와 1대대는 곧 이동을 개시해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ref>{{웹 인용|url=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3e183fbf37a5cfa9871bf87ccbad24ac.pdf|제목=김포지역 6.25전쟁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파일:Mortar M29.jpg|섬네일|281.989x281.989픽셀|81mm 박격포]]
 
=== 9월 20일 ===
[[파일:60mm mortar M60.jpg|섬네일|60mm 박격포]]
3대대는 김포반도 북서쪽 방어를 위해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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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1일 ===
[[파일:DUKW 3.jpg|섬네일|북한군 포로와 노획무기를 이송한 미군의 수륙양용차량 DUKW]]
06시경 작전준비를 막 시작하려던 제 3대대 본부에 인근주민이 북한군의 출현사실을 알린다. 상당수의 북한군이 선수동 마을에 들어와 아침식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대대장의 출동명령을 받은 9중대장 황영 중위는 1,3소대를 우선 출동시킨다. 공격부대는 개활지를 통과 중 북한군의 사격을 받는다. 안개 덕분에 북한군의 사격이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진격하는 데에는 고전하였다. 출동한 1,3소대를 제외한 9중대의 잔류인원은 총격전의 영문을 모른 채 신리 일대에 서성대는 북한군 부대와 전투를 치른다. 11중대는 소부대 단위로 탐색 작전에 나서던 길이었으나 향산리 일대에서 분산 대기 중이던 북한군들끼리 내분이나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시작한다. 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화기중대를 추격부대로 동원한다.
 
김포 중심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화기중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받는다. 김포경찰서 북동쪽에 위치한 천주교 뒷산에 107연대의 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휘본부는 이광수 병조장이 이끄는 제 2소대의 급습을 받는다. 그리고 107연대장을 생포한다. 포로는 신문에 순순히 응했고 물을 청했다. 중대장 정충철 중위는 연락병에게 물을 떠다 주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북한군 장교 생포사실을 알리기 위해 [[:en:SCR-300|SCR-300]] 무전기로 대대장을 호출하는 동안 포로에 대한 주의를 잊었다. 이 때 포로로 잡힌 북한군 107연대장은 카빈소총을 순식간에 가로채 정 중위를 사살했다. 물을 떠오던 연락병이 지체 없이 포로를 사살했지만 너무 늦을늦은 후 였다.
{| class="wikitable"
[[파일:SCR-300 battery-powered FM voice receiver transmitter, Motorola, 1940 - National Electronics Museum - DSC00176.JPG|섬네일|우리나라가 통신에 사용한 SCR-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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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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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박격포
|[[파일:Mortar M29.jpg|섬네일|281.989x281.989픽셀|81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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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0mm mortar M60.jpg|섬네일|60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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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장비
|[[파일:SCR-300 battery-powered FM voice receiver transmitter, Motorola, 1940 - National Electronics Museum - DSC00176.JPG|섬네일|우리나라가 통신에 사용한 SCR-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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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파일:DUKW 3.jpg|섬네일|북한군 포로와 노획무기를 이송한 미군의 수륙양용차량 DU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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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의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