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 (153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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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李軼, [[1535년]] ~ ?)은 [[조선]]시대의 인물이다. [[양녕대군]]의 5세(고손자)이다.
'''의병장 이철(李軼)'''
 
== 의병 활동 ==
양녕대군의 5세(고손자)이다. [[조선 중종]](中宗) 30년, 서기 (1535년(乙未)생으로에 태어났다. [[임진왜란(1592~1598)시]] 당시 양근현(현재 [[양평군]]) 지역에 4명의 아들(應星응성, 應吉응길, 應周응두, 應斗응주)을 포함하여  6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훈련, 주둔하고, 왜군과 결사항전을 벌였던벌였다고 의병장이다한다. 의병활동은 양평, 광주, 양지(용인) 등의 지역에서 펼쳤으며, 특히 왜군일본군 수장장수인 중천수정[[나카가와 히데마사]](中川秀政, 나카가와 히데마사) 양지의 산 속에서 야간 매복전투를 벌여 사살하는 등 왜군의 경기도 일대의 진퇴로를 차단하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올렸다고 한다
 
임진왜란시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에게 [[1605년]](선조 38) 4월 녹훈하며 발행된 ‘선무원종공신녹권’과[[선무원종공신녹권]]과 '《[[선조실록']]》에는 1등 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조 임진란 의병장록'에 의하면 '회덕현감' 에 취임하지 않았으며, 선조께서 아들 4 형제에게는 수십필의 옷감과  땅을 하사하셨으며, 난이 평정된 후에 입석표공(비석을 세워 공로를 표함)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응성은응성(應星)은 군수, 응길은응길(應吉)은 주부, 응두는응두(應斗)는 직장, 응주는응주(應周)는 도사의 관직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전란사 상권 373항, 하권 1586항 등에 경기도 지역의 "'의병장 충의위(忠義衛) 이철(李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분류:1535년 태어남]]
[[분류:전주 이씨]]
[[분류:조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