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96번째 줄: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 데다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청군은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격파당하여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었다.<ref name="jukk159"/>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고 청군을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이 청군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無力)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조선군은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군사 1만2천과 백성 수만을 지탱할 비축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인조|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ref name="jukk159"/>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을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ref name="jukk159"/>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계속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벽을 타격했고 직결된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ref name="jukk160">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60페이지</ref> 1월 22일, 세자빈과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꺾였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조선의 고집이 겪은 참극이라고 생각된다.<ref name="jukk160" />
 
== 항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