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0번째 줄:
[[흥덕왕]]의 3년([[828년]]) 1월 [[대아찬]](大阿飡)과 시중(侍中)에 발탁되었지만, [[831년]] 1월 수도 금성(金城, [[경상북도]] [[경주시]])에 일어난 지진이 결국 원인이 되면서 시중이 면직되었다. [[834년]] 1월에 다시 시중이 되었지만, [[835년]] 2월에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취임하면서, 우징은 시중 직을 사임했다. 이 때에 후임 시중이 된 사람은 [[민애왕|김명]](金明)였다.
 
흥덕왕의[[흥덕왕]]의 사후, 상대등 직에 있던 아버지 균정과 조카 [[희강왕|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 중에 균정이 죽어 희강왕이 즉위하였고, 우징 등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무사히 달아났다. 그 후, [[희강왕]]을 옹립 한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838년]] 1월 왕으로 즉위 하였고, 우징파는 동년 3월부터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우징의 장군 [[김양]](金陽)이 왕도에 도착하여, 839년 1월 19일에 민애왕을 시해했다. 우징은 왕의 의례로 민애왕의 시체를 매장하였고, 또, 고례에 준거하고 즉위식을 거행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 즉위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