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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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각 특무대 소관 지역 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 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
 
==== [[1933년]] 영릉가흥경성 전투 ====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략해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 환인, 신빈, 유하, 휘남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도 진격해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6월 15일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 청원 등지로 공격해왔다. 이에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이해천]](李海天), [[김일룡]](金一龍), [[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되었다.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