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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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나라|미국|1912}}<ref>{{뉴스 인용| url=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849150,00.html | work=Time | title=THE CONGRESS: Sounding Trumpets | date=29 January 1940}}</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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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War in Finland, 1940 HU55566.jpg|right오른쪽|섬네일|250px|[[1940년]] [[핀란드]] 스키부대]]
 
'''겨울 전쟁'''({{llang|fi|talvisota|탈비소타}}, {{llang|ru|Советско-финская война}}, {{llang|sv|vinterkriget}})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일명 '[[계속 전쟁]]' 인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1939년 말까지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버텼으며 이때 양자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맺고, 소비에트 연방에 [[카리알라]] 동부 지역(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을 넘겨주었으며,<ref name="ckpipe"/> 소비에트 연방은 이 땅과 [[카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합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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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퀴외스티 칼리오]]가 이를 거부하자, 핀란드 침공에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국경지대인 만네르헤임 선 부근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공격했다며 이를 이유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를 이른바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 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었으며 [[11월 30일]] 46만 명으로 이루어진 23개 사단으로 핀란드를 공격해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1939년]] 10월부터 이와 같은 침공을 위해 소련은 이미 국경지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llang|ru|Andrei Zhdanov}})가 비밀리에 [[그리고리 쿠릭]]({{llang|ru|Grigory Kulik}})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소련군에게 고의적으로 포격을 한 후 핀란드군의 공격이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당시 핀란드군 포병의 장사정 포는 마이닐라까지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즉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약 20km에서 25&nbsp;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이러한 '핀란드군의 포격'에 의한 소련군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 이후 스탈린과 그의 군부 지도자들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뜻밖의 반격을 당하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은 대항했고, 협상 테이블에서처럼 끈기 있게 싸웠다. 그들은 모든 인력과 빈약한 물자 그리고 전통적으로 기지(機智)가 풍부한 국민성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빙점 이하의 혹한 속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아내가면서 거대한 소련군과 대결했다. 이 핀란드와 소련과의 싸움은 당시의 가혹한 기후 때문에 겨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르요키(Terijoki)<ref>현 [[젤레노고르스크 (상트페테르부르크)|젤레노고르스크]](Zelenogorsk)</ref> 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르요키 정부'라는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 목적<ref>소련은 즉시 이 정부를 핀란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ref> 과 군사 목적<ref>핀란드군의 공산주의자들을 회유하려 했다.</ref> 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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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침공 ==
11월 말이 되자 소련군은 공격 개시 태세에 들어갔다.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7군 산하의 10개 사단 병력과 6개 전차 여단은, 24만명의 인원, 1,500대의 탱크, 야포 900문 그리고 항공기 300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카렐리안 지협에 구축된 핀란드 축성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완료했다. 일차 공격 목표는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를 점령하여 [[라도가 호]]의 북쪽 연안에 이르는 도로의 중요한 교차점을 단절시키는 데 있었다. 이 작전은 핀란드군을 분산시킨 다음 소련군이 수도 [[헬싱키]]에 진격하기 위한 것이였다.
한편, 소련 제8군 산하의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은 병력 15만, 탱크 545대, 포 520문 그리고 항공기 200대를 가지고 라도가호를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곳에서 소련 제7군과 연결될 예정이었다. 좀더 북쪽으로는 소련 제9군 산하의 5개 보병사단이 9만 5천의 병력, 275대의 전차 및 포 360문을 가지고 보드니아만의 입구인 [[스웨덴]]과의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목적은 [[핀란드]]와 [[스웨덴]]과의 육상 교신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북극권에서는 소련 제14군 산하의 3개 보병사단이 병력 5만 5천, 전차 165대, 포 220문의 전력으로 페차모 지역을 점령한 뒤, 유일한 길인 500km에 달하는 북극 하이웨이를 따라 [[로바니에미]]까지 남하한 다음, 스웨덴 국경을 향해 서진할 계획이었다.
[[11월 30일]] 오전 7시, 소련군은 600문의 포를 동원, 아무런 예고 없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30분 뒤, 소련군 전차와 보병이 진격을 개시했다.
같은 날 아침 소련군은 헬싱키, 비푸리, 투르쿠, 항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21개 지역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9시 15분부터 개시된 수도 [[헬싱키]]의 폭격에서는 90명 가량의 시민이 사망하고 300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소련군은 남카렐리아와 [[콜라 반도]], 라플란드에서 침공을 시작했는데, 당시 11월 30일만을 기준으로 핀란드군과 소련군의 비교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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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아보 탈벨라의 도움 ==
그러나 만네르하임은 반격을 중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심각한 시기에 만네르하임은 한 핀란드 사람으로부터 예견치 않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도움을 제의한 사람은 기업인이자 핀란드 군수물자 구매 위원회의 한 사람인 [[파아보 탈벨라]]였다. 예비역 대령인 그는 지난 수일 동안 핀란드군이 당하고 있는 패배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탈벨라는 핀란드 내각에서 만네르하임과 절친하게 지내던 자신의 친구 루돌프 발덴 장군을 설득해 만네르하임과 만날 약속을 했다. 헬싱키의 한 호텔에서 세 사람이 만나자 탈벨라는 호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핀란드군은 패주만 하고 있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탈벨라는 [[만네르하임]]에게, 소련군을 [[라도가호]] 북쪽 동부 전선에서 저지하지 않으면, 적은 그쪽으로 들어와 만네르하임선 후방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발덴 장군은 놀라워했다. 그 누구도 오만한 만네르하임에게 그런 투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덴 장군은 닥쳐올 결과에 대해 두려워 했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만네르하임이 그의 발언을 끝까지 침착하게 듣고 난 후, 탈벨라가 요구한 대로 그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만네르하임은 탈벨라에게 급히 편성한 1개 연대와 3개 대대 병력을 주어, [[톨바야르비]]호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톨바야르비 마을([[페트로자보츠크]] 서북서쪽 약 160km, 레닌그라드 북쪽 약 270km)로 보냈다. 이곳은 소련군의 전초병이 있는 코티사리섬에서 1.6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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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보 탈벨라]]가 지휘를 맡기 이전의 그 지역 핀란드군은 적의 포화에 쫓겨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벨라는 여기서 버티기로 결심했다.
12월 8일, 탈벨라는 자정 직전에 기습 공격을 명했다. 얼어붙은 호수를 소리없이 건너가, 잠이 든 소련군을 기습한 것이다. 핀란드군은 소총과 수오미 경기관포로 얼마간 공격한 뒤 숲 속으로 철수했다. 어리둥절한 소련군은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핀란드군은 톨바야르비의 진지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처음으로 게릴라 전법의 맛을 보게 되었다. 이 전법을 후일 핀란드군은 아주 치명적인 전술로 발전시키게 된다.
핀란드군은 이 전법을 되풀이 사용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적군의 휴식을 빼앗았다. 핀란드 특공대들은 흰색의 위장복을 입어 눈덮인 숲속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스키를 이용하여 유령처럼 소리없이 나타나 공격하고는 사라졌다. 전원이 스키에 능숙하고 숲속 생활에 익숙하여 마치 사냥을 하듯 소련군을 습격했다. 또한 그들의 사격술은 거의 완벽하여 소련군들은 이들을 하얀 주검이라 불렀다. 한 소련군 장교는, "그들은 700~800m 거리에서 목표물을 사격하며, 거의 실수가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핀란드가 동원한 병력은 33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게릴라식 전투와 흰 보호색 군복을 입은 기동력이 좋은 스키부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기초해 만들어진 일종의 화염병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는데, 전쟁 개전 초기 헬싱키 도심에 가해진 무차별 소이탄 공격으로 쏟아진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던 소련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핀란드인들이 “그렇다면 이 술이나 받아라”<ref>[http://www.hani.co.kr/arti/culture/skysea/185095.html 최고 전쟁사가가 그린 20세기 ‘아마겟돈 전쟁’], 한겨레, 2007-01-18</ref> 하고 화염병을 던졌던 것이다. 1939-40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해 -40&nbsp;°C 수준의 온도가 보통이었으며 이는 핀란드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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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된 소련군 제163사단은 성탄 전야를 기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동상에 걸린 그들은 가슴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면서 탈출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핀란드 저격병의 총탄에 몰려 얼어붙은 참호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호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참호 밖으로 되몰려 나와야 했다. 실라스부오 대령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수류탄, 권총, 총검 등 닥치는 대로 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적진을 유린했다. 그들의 탱크조차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탱크에 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해서 12월 28일, 소련군 제163사단은 괴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포로 500명과 탱크 11대를 노획했다. 이 전투 이후 핀란드군의 관심은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44기갑사단에 집중되었다. 이 기갑사단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전력 면에 있어서는 1만 8천의 병력과 4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한 여전히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다.
한편으로 핀란드군 척후대가 제44기갑사단의 방위선을 탐색하는 동안, 핀란드 공병대는 소련군 진지 남방 8km 자점에 위치한 여러 개의 호수와 나란히 지나는 '눈길(snow road)'을 만들었다. 그 다음, 이 눈길을 따라 집결지를 설치하고, 난방이 된 거처와 따뜻한 음식을 마련했다. 핀란드군은 이러한 집결지에서 잘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소련 방위선상 취약점을 골라 잠복했다가 적을 덮쳤다. 소련군은 번번히 참패였다.
 
1월 8일에 이르러 전투는 거의 끝났다. 모두 27,500명의 소련군이 전사했고, 1,300명은 핀란드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핀란드의 다윗이 소련 골리앗을 무찌른 것을 찬양했다.
한편 스탈린은 분노하여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그들의 무능을 꾸짖었다. 필연적인 결과로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재수없이 걸려든 비노그라도프는 겨우 살아남기는 했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그가 처벌된 표면상의 이유는 "적에게 55개의 야전 주방을 탈취당한" 죄목이었으나, 실은 미숙한 전술로 소련 국가에 끼친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수뇌부는 실라스부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수오무살미 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전공을 포상했다. 실라스부오는 다음으로 소련 제54사단에 목표를 맞추고 쿠모(수오무살미 남쪽 약 88km) 근처에서 이를 급습했다. 소련군은 또다시 참호를 파고 항전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보급을 공중 투하에 의존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에게는 대공포가 거의 없어, 소련 공군이 식량과 탄약을 투하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소련 항공기의 비행음을 듣고서 신호탄을 쏘아 소련의 보급 항공기가 아군 지역에 보급품을 투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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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의 분노와 소련군의 근본적 문제 ==
한편 스탈린은 매우 분노하였다. 핀란드가 그런 결사적인 저항을 해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소련군의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소련의 자만과 무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은 그리 큰 저항을 예상하진 않았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관들이 80%가 평화시에 희생당했었다. 이들은 보통 무능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구식이 된 작전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과서적인 작전만을 고집했다. 또 겨울에 벌이는 전쟁, 특히 삼림 지대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핀란드군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이들이 대량 사용한 군용 차량은 이같은 조건에 매우 취약했다. 소련군의 한 부대가 핀란드 복병들로 둘러싸인 곳에 제발로 진주해 전멸당한 [[라테 가 전투]]([[:en:Battle of Raate Road|Battle of Raate Road]])는 지금도 군사학에서 절대 범하면 안될 중대한 실수의 예로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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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분노한 스탈린은 먼저 속죄양을 찾았고, 여기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걸려들었다. 1940년 1월 어느날 스탈린은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을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저택으로 소환하였다.
이 모임은 그해 겨울이 유별났던 것만큼 이상한 성격의 회동(會同)이었다. 저녁 식사 도중 스탈린은 벌떡 일어나 보로실로프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지휘관으로서 부적합한 보로실로프가 핀란드 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보로실로프가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신(스탈린)은 오로지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소련군의 수구파(守舊派)를 숙청하여 훌륭한 군인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았소..."(1937년 피의 대숙청)하고 외쳤다. 이어 보로실로프는 통돼지 구이가 담긴 쟁반을 집어들어 식탁에 내동댕이쳤다. "내 평생에 그런 폭발은 처음 보았다."흐루시초프는 뒷날 이렇게 회상했다. 더욱 놀란 것은 스탈린이 매우 차분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그를 직위 해제했으나 처형하지는 않았다.
 
== 핀란드 침공 소련군의 대대적 개편 ==
한편 스탈린은 핀란드 진주군 사령관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다. 그는 메레츠코프가 수립한 기본적인 공격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병이 겨울 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다시는 패배를 맛보지 않도록 전선에 병력을 증강했다. 당초 소련은 54만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현재는 티모센코 휘하에 90만의 병력이 있었다. 소련군 전선 후방에서는 병사들에 대해 공격 전술에 관한 집중적인 훈련이 실시되었다. 또한 핀란드의 기를 꺽기 위해 추가로 2,800문의 각종 포를 전선에 반입, 화력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을 감행했다. 수주일에 걸친 목격은 방위선 후방을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핀란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2얼 1일, 소련군은 강력한 탱크 부대를 앞세워 척후 공격을 카렐리아 지협 전반에 걸쳐 개시, 본 공세에 앞서 핀란드군을 한풀 더 꺽었다. 공격은 조직적으로 행해져, 야포와 공중 지원을 받은 소련 공병들은 핀란드군이 대전차 장애물로 이용해온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한 뒤 그로 인해생긴 틈새로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 다음에는 탱크 부대가 진격하고 대규모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폭격기가 핀란드 진지를 폭격했다. 핀란드군이 한 공격 부대를 격퇴하면 또다른 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만네르하임은 "소련군이 이제는 서로 다른 부대와 협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법을 터득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 핀란드의 패배 ==
2월 11일, 새로 충원을 받은 티모센코 원수 휘하 부대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2주 반 동안 소련은 강력한 공격을 되풀이해 핀란드 방위망을 뜷고 내륙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핀란드군은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절망적인 노력의 하나로 전에는 불합격시킨 자도 징집하고, 부상자를 재소집하였으며, 심지어 10대 학생으로 자원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일이 많았다.
봄이 되자 만네르하임 휘하의 장병들은 아직도 국부적으로 반격을 가해 승리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포탄이 거의 동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탈벨라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곳이 위기에 처했다." 핀란드의 방위가 어느 한 모퉁이만 무너지면, 핀란드 전체가 와해될 것이었다. 만네르하임도 이제는 패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핀란드군의 피해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만네르하임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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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겨울 전쟁| ]]
[[분류:핀란드의 전쟁]]
[[분류:소련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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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40년 소련]]
[[분류:소련-핀란드 관계]]
[[분류:겨울제2차 전쟁|세계 대전 중 핀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