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케 테무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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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립은 [[1364년]] 반황태자파였던 볼루드 테무르가 대동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대도로 나아가 대칸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정권을 탈취하고,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수도를 빠져나와 태원의 코케 테무르에게로 달아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코케 테무르는 황태자와 연합해 볼루드 테무르와의 결전에 나섰고, 이듬해인 [[1365년]] 코케 테무르의 군대는 대도로 진격했고, 볼루드 테무르는 측근의 배반으로 살해되고 그의 세력은 멸망하였다. 코케 테무르는 대도에 입성해 황태자를 중앙 정계로 복귀시키고 이 공으로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의 지위와 하남왕(河南王)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내분 와중에 그러나 이 내전을 틈타 강남에서 반원 농민봉기를 일으킨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이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한국의 《[[고려사]]》(高麗史) 공민왕세가공민왕세가에는 [[공민왕]] 14년([[1365년]])에는 감찰대부(監察大夫)처음 [[전녹생]](田祿生)과사신을 환관인 부원군(府院君) [[방절]](方節)을보내 원에 보내 황태자 아유시리다르 및 코케 테무르와 [[심양왕|심왕]](瀋王) [[토크토아부카]] 등에게 예물을 주게 하였는데<ref>《고려사》 공민왕세가 14년([[1365년]]) 4월 13일(신축)</ref> 이들은원의 황태자난리 아유시리다르의때문에 명령으로원으로 사명을 다하지들어가지도 못하고 귀국하여야 했다.끝났고, 이듬해 공민왕3월과 15년5월에 재차 감찰대부(1366년監察大夫) 5월 다시[[전록생|전녹생]](田祿生), [[정원비]](鄭元庇)를 파견하여보내 코케 테무르에게테무르를 예방하게만나게 하였고,하였으나 전녹생은 황태자 아유시리다르의 명령으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귀국하여야 했다. 코케 테무르는 11월 중서검교(中書檢校) 곽영석(郭永錫)을 보내 앞서 전녹생 등을 따라 원에 갔다가 병을 이유로 귀국하지 않고 있던 서장관 [[김제안]](金齊顔)과 함께 고려로 가서 예방하게 하였다.<ref>《고려사》권제41 세가제41 공민왕 15년(1366년) 11월 23일 신축</ref>
 
코케 테무르는 황태자의 신임 아래 원군 총사령관을 맡아 당시 중국 대륙 각지에서 벌어지던 반원 운동 진압을 총지휘하게 되지만, 하남 군벌 이래로 한인(漢人) 출신의 장교들이 군대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한인 출신 장병들은 서서히 코케 테무르의 지휘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1367년]]에는 토곤 테무르로부터 정치와 군사의 전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칸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얻은 아유시리다르는 차츰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코케 테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원군 내부의 분열도 깊어졌다. 코케 테무르는 대칸이었던 혜종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겨우 정치 군사적인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껏 용맹하다는 명성을 떨쳐 오던 코케 테무르의 군은 주원장이 선포한 새로운 왕조 명(明)의 군세 앞에 패배해 하남과 태원 지역을 잃고 [[감숙성]]으로 달아났고, [[1368년]] 원은 결국 대도를 버리고 북방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