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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읍|목천면]]에서는 이종성(李鍾成) 등의 주동으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趙仁元), 지역 유지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속장 조인원 등도 총격으로 부상당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 투옥과 사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