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호아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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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1 = [[앙렉상드르 외젠 부에]]
| 지휘관2 = [[유영복]]
| 병력1 = 2,500 해병대 보병<br />450 황기 보급대<br />3문 대포 <br />6척 포함
| 병력2 = 3,000명 흑기군
| 사상자1 = 17명 사망<br />62명 부상
| 사상자2 = 300명 사망<br />800명 부상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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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통킹 원정]]은 통상적으로 1883년 6월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1883년]] [[5월 19일]], [[꺼우저이 전투]]에서 [[앙리 리비에르]]가 [[유영복]]의 [[흑기군]]에게 패배해 전사하자 이것을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통킹에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증원군은 통킹 원정 군단으로 구성하고, 여단장 알렉상드 외젠 부에 (1833–1887)의 휘하에 편입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에서 가용할 수 있는 최고위급 해병대 장교였다.
[[Image파일:Map of Phu Hoai.jpg|thumb섬네일|left|푸호아이와 그 주변 지역]]
1883년 6월 초 부에가 통킹에 도착할 무렵, 프랑스의 지위는 매우 위태로웠다. 프랑스는 [[하노이]], [[하이퐁]], [[남딘]]에 소규모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혼가이]]와 [[안남]]의 [[꾸이년]]에서 고립된 초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유영복의 흑기군과 베트남 왕자 호앙께비엠이 이끄는 베트남군에 대한 공세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ref>Duboc, 139–51; Huard, 83–4; ; Thomazi, ''Histoire militaire'', 59–60</ref> 6월에 프랑스군은 수비군의 배후를 쳐서, 하노이와 남딘의 사기가 떨어진 베트남군을 물리쳤다. <ref>Huard, 84–8</ref> [[프랑스]]와 [[뉴칼레도니아]]에서 증원군이 조기에 도착했고, 코친차이나의 징병군과 베트남인 치중대는 부에가 골칫거리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7월 19일, 남딘의 프랑스군 선임 지휘관 피에르 드 바당스 대대장이 호앙께비엠 왕자가 이끄는 포위를 하고 있던 베트남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해서 남딘에 대한 베트남의 압박을 효과적으로 완화시켰다.<ref>Duboc, 156–7; Huard, 88–92; Nicolas, 262–4</ref>
 
[[1883년]] 7월, 아메데 쿠르베 제독이 상당수의 증원군을 이끌고 알롱만에 도착하면서, 통킹에 있는 프랑스군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프랑스는 현재 유영복에 대한 공격을 고려할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흑기군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려면 후에의 베트남 조정과의 정치적 합의가 수반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필요하다면, 강요를 해서라도, 통킹의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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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Commons category위키공용분류|Sino-French War}}
* Bastard, G., ''Défense de Bazeilles, suivi de dix ans après au Tonkin'' (Paris, 1884)
* Duboc, Emile, ''Trente cinq mois de campagne en Chine, au Tonkin'' (Paris, 1899) {{OCLC|41955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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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omazi, A., ''La Conquête de l'Indochine'' (Paris, 1934) {{OCLC|154148440}}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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