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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뜨득 (연호)|뜨득]] 35년)에 [[뜨득 황제]]가 승하하자, 존실설은 [[응우옌반뜨엉|완문상]] · 진천성과 함께 [[섭정]]을 역임했다. 완문상이 관료의 임명을 마음대로 하는 한편, 존실설은 군을 장악했다.
 
뜨득 황제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3명의 조카(31세 완복응진(뜨득 황제의 동생인 서태공 완복홍의의 차남), 19세의 완복응시 (완복홍의의 동생인 견국공 완복홍해의 장남), 그리고 14세의 완복응등(완복홍시의 동생)를 양자로 들였다. 3명의 대신들은 완복응진을 옹립하고 즉위시켰지만, 불과 3일 만에 폐위하고 뜨득 황제의 동생 [[히엡호아 황제]]를 대신 옹립했다. 대신들의 전횡에 불만을 가진 [[히엡호아 황제]]는 존실설을 이조 상서로 이동시켜 군권을 빼앗으려 시도했다. 또한 프랑스에 접근했지만, 존실설과 완문상은 프랑스인이 없는 동안에 [[히엡호아 황제]]를 죽이고 완복응등을 황제([[끼엔푹 황제]])로 옹립했다. [[끼엔푹 황제]]의 옹립을 반대한 진천성도 이후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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