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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1=소련측 추측 : <br /> 16만 명 사상 <br /> 20만 명 병사
|사상자2=소련측 추측 : <br /> 36만 2664명 사상 <br /> 74만 6485명 병사
|}}{{전역상자 독소전쟁}}
|}}[[파일:Eastern Front 1941-12 to 1942-05.png|섬네일|1941 ~ 1942년 겨울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
'''르제프 전투'''는 [[1942년]] 1월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근방에서 발생한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투이다. 1941년 9월 30일 [[독일군]]은 모스크바 총공세를 감행했지만 [[소련군]]의 성공적인 방어작전으로 12월 말 공세가 돈좌되고 전력을 보충한 [[소련군]]의 반격이 개시된다. [[소련군]]의 동계 반격 작전의 일환으로서 모스크바 외곽으로 돌출해 있던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르제프는 1943년 초 [[독일군]]이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물러날 때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소련 및 현대 러시아 공식 전사에서는 르제프 전투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 르제프-뱌지마 공세(1942년 1월 8일 ~ 4월 20일) : 칼리닌 전선, 서부 전선, 브랸스크 전선, 북서부 전선
** [[시요브스크-뱌지마 공세]](1942년 1월 8일 ~ 4월 20일) : 칼라닌 전선
** [[모자이스크-뱌지마 공세]](목성 작전, 1월 10일 ~ 2월 28일) : 서부 전선
** [[토르페츠-홀름 공세]](1월 9일 ~ 2월 6일) : 1월 22일부터 북서부 전선과 칼라닌 전선 재공세
** [[뱌지마 공수 작전]]([[하노버 작전]], 1월 18일 ~ 2월 28일) : 서부 전선
** [[르제프 작전]](3월 3일 ~ 4월 20일)
 
* [[자이들리츠 작전]]과 [[홀름 포위전|벨리, 홀름 방어전]](7월 2일 ~ 7월 23일) : 독일 제9군의 벨리, 홀름 돌출부 제거 및 소련 제39군과 제11 기갑 군단 궤멸
 
* [[제1차 르제프-시요브카 공세]](7월 30일 ~ 8월 23일, 또는 9월 30일 또는 10월 1일) : 칼리닌 전선, 서부 전선
 
* 제2차 르제프-시요브카 공세([[화성 작전]], 11월 25일 ~ 12월 20일) : 칼라닌 전선, 서부 전선
** [[벨라키예-루키 공세]](11월 24일 ~ 12월 20일) : 칼라닌 전선의 소련 제3 충격군
 
* 제3차 르제프-시요브카 공세(1943년 3월 2일 ~ 3월 31일) : 칼라닌 전선, 서부 전선과 동시에 브랸스크 전선 남쪽 측면에 대한 공세, 이로써 독일군이 후퇴함
 
== 1. 르제프 전투의 경과 ==
당시 소련군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만큼 독일군도 지쳐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피해를 수습하고 있었고, 심지어 부대 재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의 칼라닌 전선군은 선공을 시작했고, [[볼가강|볼가 강]]을 건너 [[브야즈마]]를 목표로 남진했다. 그 다음 날에는 서부전선군이 모자이스크로 전진했다. 이 후로 북서전선군과 브리얀스크 전선군도 속속 전진을 시작했다. 독일의 지휘부는 어느 정도의 전선 소강을 예측했고, 소련의 이러한 공세에 놀랐다. 독일군은 소련의 공세에 후퇴했기에 부대 간 방어 구역의 재정립이 정확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소련의 공격이 연이어 이루어지자 전초가 곳곳이서 뚫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칼라닌 전선군은 독일의 [[중부 집단군|중부집단군]]과 [[북부 집단군|북부집단군]] 사이로 돌파하여 무려 100km를 남진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서부전선군도 1월 20일에 모자이스크를 탈환하고 남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르제프]]를 향해 진격하던 칼라닌 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은 [[독일 제 9군]]의 격렬한 저항에 공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두 전선군이 교착된 상황에서도 다른 전선군은 진격을 계속했기 때문에 르제프 지역만 돌출된 이상한 모습의 전선이 형성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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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르제프 전선의 교착화 ===
소련은 스탈린의 의도대로 독일군을 모스크바에서 멀리 밀어붙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고, 모스크바 수비 후 바로 시작된 공세였던 터라 1월 말이 되자 소련군의 공세는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틀러는 르제프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 9군의 사령관으로 방어전의 귀재인 [[발터 모델]]을 선임했다. 모델은 현지에 부임한 지 얼마 안 있어서 소련군의 진격이 멈춘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독일 군부의 우려와는 다르게 현지 사수가 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르제프 사수를 위해 소련군의 예상 접근로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였고, 진지가 돌파 당하면 후방에 준비되어 있는 강력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방어를 진행했다. 소련 또한 혹한에 보급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흘러가게 되면서 진지를 구축하고 대치하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전선은 교착되었고, 교착된 전선은 1943년 5월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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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독일의 반격 ===
모델은 소련 칼리닌 전선군의 예하에 있던 제 39군의 좌측면을 돌파했다. 이로 인해 제 39군은 르제프 서쪽에 포위됐다. 동시에, 서부전선군의 제 33군도 유흐노프 동쪽에서 독일군에 의해 강타 당했다. 결국 33군은 독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제 33군은 그렇게 사라졌다. 제 33군을 격멸하고 난 모델은 제 39군 또한 섬멸할 계획인 ‘[[자이들리츠 작전]]’을 수립했다. 독일 23군단이 북쪽을 견제하고, 제 [[2전차사단의]] 별동대가 남쪽에서, [[제 56장갑군단]]이 남쪽으로 파고 들어가 소련의 제 39군을 둘로 쪼개서 각개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2년 7월 2일 독일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고, 결국 소련의 제 39군은 7월 12일 완전히 섬멸됐다.
 
== 2. 르제프 전투의 결과 ==
 
== 3. 르제프 전투의 의의 ==
{{독소 전쟁}}
 
{{전거 통제}}
{{토막글|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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