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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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당시 단체에 참여했던 한국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감리회]], [[조선남감리회]]였고, 외국선교부는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연합 장로회, 미국 북감리회, 미국 남감리회였고, 기독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와,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조선기독교청년회]](YMCA)였다. 실질적으로 오늘날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NCC)는 처음에는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이후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1937년 해산될 당시에는 11개 회원 단체 외에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 개신교계는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에큐메니컬]] 대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현대 선교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윤치호가 비공식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대회는 계속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후에 국제선교협의회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세계 선교의 상황 속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국제선교협의회의 산하 기구인 국가단위의 교회일치운동 조직이 되었다. 이것은 최근에 무리를 일으킨 기독교와 로마 가톨릭과의 직제와 신앙 일체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회원대표 규정에 따라 한국 개신교의 대표가 선교사의 수를 넘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인들이 공의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선교사들은 폐지하기로 했던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를 존속시키면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는 별도의 협의체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이제 한국인 주도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제한적이었지만, 이전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각종 사업에 참여하면서 외국인 선교사 의존의 시대를 벗어나 한국인 주체의 한국 개신교 형성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일제]] 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폐쇄되어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는 친일단체로 변모하였고, 한국 개신교계는 1945년 7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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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유착했던 한국 개신교는 [[4·19 혁명]] 이후 예언자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반성하는 계기를 맞았지만,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했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은 처음으로 한국 개신교 청년들을 정치 현장을 불러냈다. 이후 한국 개신교계는 삼선개헌에 대한 찬반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위수령과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10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0월 유신|유신개헌]]을 강행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운동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보고확대하여 가혹하게 탄압했다. 예를 들어 1974년 4월 정부는 개헌운동을 막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조작했다.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183명이 사형 및 무기징역을 포함한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그 결과 소장파 목사들과 구속자 가족들, 신자들이 참여하는 목요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4일 인권위원회를 창립하여 한국사회의 인권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소속 교단의 청년회 대표들은 1976년 1월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cumenical Youth Council)를 창립했다. 이후 한국기독교청년연합회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개신교 내 좌익 민주화 운동의 전위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긴급조치|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자 1976년 1월 15일 목요기도회를 재개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한국에 종교의 자유를자유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 개신교 대형집회를 허용했다이용했다. 1973년의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플로 74, 77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에는등은 정부정부의 지원도지원을 있었다받으면서 (정부는성대하게 기독교뿐만치러졌다. 아니라정권의 다른지원을 종교의 다양한 활동들을 일부 지원한다).받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종교인들은 주로 민주화 운동을 안탑까게용공으로 보았고,비난하거나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정치권에정권에 대한접근하면서 기독교영향력을 역할의확대했고 영향력을군사정권의 확대하므로정치적 군사정권에서도지지 보수적세력이 신앙을 지켰다되었다. 한편,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좌익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근에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들을 전개하며 기독교 내 친동성애를 주장하여 큰 무리를 일으키고 있다.
 
민주화 운동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간섭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착상태에 놓여있었다. 1982년 2월 협의회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한 이후 1985년 3월까지 정부는정부의 공권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좌익 통일활동을활동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1985년 3월 제34차 총회에서 채택한 한국교회 평화 통일 선언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좌익 통일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좌익 민주화 활동을 등에 업고 친북단체로의 성향을 점진적이고 노골적으로 전개하여 사노맹, 주사파 등의 인물들과 활동을 지지하는 좌익단체로 굳게 정착되었다. 그 예로 해산된 과거 통진당의 이석기 석방, 주한미군철수,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평화체제 등을 주장하므로 반국가적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좌익 단체들과 깊이 관여하고 있다. 급기야 2019년 8월 15일 이후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좌익 통일 활동들을 반대하는 보수신앙의 기독교인들과 시민들의 거대한 물결이 광화문으로 주기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회원단체인 CBS를 이용해 이 애국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 단체나 인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러한 좌익 통일방안 활동의 전개를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7차 총회에서 채택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조국의 통일문제를 두고 고민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가맹 교단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통일에 대한 고백적인 내용을 담아 남북한 우리 민족과 온 세계 앞에서 선언한 것이다. 이 KNCC 통일선언은 한국 개신교계가 그동안 진행시켜 오던 통일 논의를 처음으로 종합 정리함으로써 이전의 통일운동의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종교기독교 운동의 하나의 척도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기독교 내 좌익세력의 역사적 장을중요성을 열었다갖는다. 이 선언을 통해 한국 개신교계의 통일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있었다. 동시에 평화통일선언 20주년 기념예배를 경동교회와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개최하였으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발표한 [[리마예식]], [[성공회 기도서]] 등 다양한 전례 문서를 참조하여, 고교회적 예배로 집전되었다.
 
2011년 11월부터 기존 개신교 7개 교단 외에 루터교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인 한국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총 9개 교단이 가입하여 활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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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보수적 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연합예배를 드리면서 한국 개신교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공동으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으며 2010년 광복 65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공동으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8.15 대성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에큐메니컬 운동]]을 같이 하는 협력 단체로서 개신교 내의 일치운동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일치 운동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보수 기독교단체의 강력한 비난을 사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 로마가톨릭과의 직제와 신앙의 일체를 집요하게 요구하므로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가톨릭과 분리된 기독교의 성경적 신앙의 구별됨을 퇴색시키려 한다는 비난의 중심에 서 있다.
 
== 조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