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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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무르면서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를 파리로 옮기고 파리에 살던 독일인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독일노동자동호회]]를 설립했다.<ref>[[#Whe00|Wheen 2001]]. p. 128.</ref> 혁명이 독일에까지 번지기를 기대하며 마르크스는 1848년 [[쾰른]]으로 갔고,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라는 찌라시를 돌리고 다녔다.<ref>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Demands of the Communist Party" contained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7''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7) pp. 3–6.</ref> 여기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열 가지 요지 중 네 가지만 발췌, 재인용하여 혁명을 선동했다.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키려면, 우선 독일 부르주아들이 [[봉건제|봉건]]군주제와 귀족제를 전복시키는 시민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f>[[#Whe00|Wheen 2001]]. p. 129.</ref> 동년 6월 1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유산을 털어 『[[신라인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유럽 전역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주필이자 대기자로서 신문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다른 맹원들도 기고를 하기는 했지만,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신라인신문』은 그야말로 마르크스 독재였다.<ref>[[#Whe00|Wheen 2001]]. pp. 130–32.</ref><ref>Seigel, p. 50</ref><ref name="DL-Marx"/>
 
마르크스 등 혁명가들은 경찰에 정기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마르크스는 여러 번 기소되었다. 마르크스가 기소된 혐의는 검사장 모욕죄, 언론지상 경범죄, 조세거부 및 무장반란 선동죄 등이었는데,<ref name="ReferenceB"/><ref name="Nicolaievsky2007"/><ref name="Splichal2002"/><ref name="Mehring2003"/>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ref name="Nicolaievsky2007"/><ref name="Mehring2003"/><ref>{{서적 인용|이탤릭체=예|last=Gross|first=David M.|year=2014|title=99 Tactics of Successful Tax Resistance Campaigns|publisher=Picket Line Press|isbn=978-1-4905-7274-1|pages=76–77}}</ref> 한편, 혁명으로 수립되었던 프로이센의 민주주의 의회가 붕괴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새 내각을 반동주의자들로 채워 반혁명 정책을 실시했다. 좌익을 비롯해 혁명분자들은 프로이센에서 숙청되었다.<ref name="ReferenceB"/>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고, 『신라인신문』은 폐간, 마르스크는마르크스는 5월 16일 추방령을 받는다.<ref name="DL-Marx"/><ref>[[#Whe00|Wheen 2001]]. pp. 137–46.</ref> 마르크스는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는 반혁명이 기승을 부리고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마르크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아내 예니가 곧 넷째 아이를 낳을 판이었는데, 독일도, 벨기에도, 프랑스도 머무를 수 없게 된 마르크스는 마침내 1849년 8월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ref>[[#Whe00|Wheen 2001]]. pp. 147–48.</ref><ref name="Watson2010"/>
 
=== 1850년–1860년: 런던 망명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