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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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도]](1952년 ~ 2003년)
* [[홋카이도]](2004년 ~ 현재)
| 홈구장 = [[삿포로 돔]][[파일:Sapporo_dome_view_from_seats.jpg|300px|
| 수용 인원 = 40,476명
| 영구 결번 = '''[[오코소 요시노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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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llang|ja|北海道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홋카이도닛폰하무파이타즈}}, {{llang|en|Hokkaido Nippon-Ham Fighters}})는 [[일본]]의 [[프로 야구]] 구단으로, [[퍼시픽 리그]] 소속이다.
1946년 '''세네터스'''({{lang|ja|セネタース}})라는 팀 이름으로 창단하여 1952년부터 2003년까지 [[도쿄도]]에 연고지로 쓰다가 2004년에 [[홋카이도]] [[
== 구단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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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다이에이 야구와 합동했던 이유로 선수의 수가 증가하여 2군을 설립했다. 팀 이름은 '''규에이 틱 플라이어스'''가 되었다. 틱 플라이어스는 규에이의 '플라이어스'에 오쓰카 어슬레틱스의 '틱'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 프로 야구 지역 보호권|프랜차이즈제]]가 시험 도입(1952년부터 정식 도입)되어 홈구장으로 [[도쿄도]] [[
[[1949년]] 오프 시즌에 양대 리그로 분립되자 퍼시픽 리그에 가맹해 참가 첫 해인 [[1950년]]에는 8구단 중 6위를 차지하며 B클래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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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오시타 히로시와의 계약 과정에서 난항이 생겨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시즌 중에 오시타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1953년]] 9월 도큐 연선인 [[
=== 도에이·닛타쿠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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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여태까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와 최하위 경쟁을 하던 도에이가 미즈하라 감독의 지휘로 막판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와 우승 경쟁을 벌였다. 난카이의 에이스 [[스기우라 다다시]]가 전력에서 이탈해 언론은 도에이의 우승을 점쳤으나 10월 11일부터 벌어진 난카이와의 5연전에서 3승을 거둘 경우 우승이 확정되었던 상황에서 3연패로 10월 15일 우승을 놓쳤고 난카이와 2.5경기 차의 2위에 올랐다. 한편 장훈이 개인 첫 수위 타자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2년]] [[도쿄 하계 올림픽]](1964년 개최)의 정비 계획을 위해 고마자와 야구장이 철거되었다. 경기장의 확보에 고생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
[[1964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고쿠테쓰 스왈로스]]가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점유해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경기가 많아지면서 정식으로 고라쿠엔 구장에 다시 이전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장훈 이외에 [[오스기 가쓰오]], [[백인천]], [[부스지마 쇼이치]], [[오시타 다케시]] 등 강타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팀은 A클래스에 들어갈지라도 우승 경쟁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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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젊은 선수들인 [[이와모토 쓰토무]], [[이마제키 마사루]], [[시마자키 다케시]], [[다구치 마사노리]], [[우에다 요시노리]], [[이데 다쓰야]]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4위에 머물렀다. 니시자키가 세이부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2년차 용병인 [[킵 그로스]]가 최다승을, 다나카가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프 시즌에 다케다, [[마쓰다 신지]]와 다이에의 [[시모야나기 쓰요시]], [[야스다 히데유키]]의 트레이드가 성립되었다. 또한 다무라가 롯데에, 시라이 가즈유키가 오릭스로 각각 현금 트레이드 되었으며 고노가 FA를 선언하며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1996년]] 이와모토. 이마제키. [[시바쿠사 히로시]]의 대두와 베테랑인 니시자키, 중견수 가타오카의 부활 등 투타가 맞물려 전반기에 2위인 오릭스와 5경기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우에다 감독이 시즌 막판에 가정의 사정으로 휴양을 선언하며 갑작스레 팀을 이탈해 결과적으로 오릭스에 역전 우승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로스가 2년 연속 최다승을 올렸고 4년차인 [[가네코 마코토]]가 신인왕을 차지했다. 2군은 홈구장을 [[가나가와현]] [[
[[1997년]] 작년 오프 시즌에 요미우리로부터 자유 계약이 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야쿠르트와의 경쟁에서 획득했다. 하지만 오치아이는 부진하며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였다. 지난해 합계 48승을 올린 니시자키·이마제키·시바쿠사·가네이시·시마자키가 일제히 부진하며 총 20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새로운 외국인 용병 [[나이젤 윌슨]]이 홈런왕을 차지했고 우에다가 오치아이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3할을 치는 등 도약했다. 결과는 리그 4위로 끝났고 2군은 이전 첫 해에 팜 일본 선수권을 제패했다. 오프 시즌에는 오랫동안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오던 니시자키를 세이부의 [[이시이 다케히로]], [[나라하라 히로시]]와 트레이드했으며 가네이시가 성적 부진으로 방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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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관중의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여태까지 프로 야구 구단이 없었던 [[홋카이도]] 삿포로에 홈구장을 이전하는 구상이 [[3월 20일]]의 홋카이도 신문에 게재되었다. 삿포로에 준 홈구장을 계획하고 있던 세이부가 반발했지만 세이부로부터는 다른 구단과의 공식전 시합도 [[삿포로 돔]]에서 개최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여 수락을 받았고, 이전 후에도 전체 경기를 도쿄 돔에서 계속 주최하겠다고 밝혔다. 오가사와라가 첫 수위 타자를 차지했고 3년차인 [[쇼다 이쓰키]]가 구단에서는 가네코 이후, 투수로써는 1980년의 기다 이후 최초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러나 팀은 5위에 그쳐 오시마 감독이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트레이 힐만]]이 부임했다.
[[2003년]] 도쿄 돔의 마지막 시즌. 이듬해부터 새로운 거점이 될 삿포로 돔에서의 경기는 2001년 7월 31일에 열린 첫 경기 이후 10경기에서 2무 8패 밖에 기록하지 못했으나 [[8월 20일]]의 대 긴테쓰 전에서 3대 1로 첫 승리를 기록했다. 팀은 2년 연속 5위에 머물렀으나 오가사와라가 2년 연속 수위 타자와 최다 출루율을 차지했다. 8월에 홋카이도의 유력 기업의 투자로 이전 이후 구단 운영 회사가 되는 '''주식회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株式会社北海道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를 설립했다. 홈구장을 삿포로 돔으로 이전했고(사무소도 도쿄 도 [[
=== 삿포로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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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분류: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분류:1946년 설립]]
[[분류:1948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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