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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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일본 [[아스카 시대]]의 [[고토쿠 천황|고토쿠 오키미]] 2년, 일본 연호로 [[다이카]](大化) 2년([[646년]]) 봄 정월 갑자 초하루(1일)에 발호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토대로 한 정치개혁 운동이다. 나카노오에노 미코(中大兄皇子, 훗날의 [[덴지 천황]])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고 [[소가 씨]] 본종가(本宗家)를 멸한 [[을사의 변]] 뒤에 이루어졌다고 하며(이 암살사건까지 다이카 개신으로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치천하대왕|오키미]](大王, 온요미는 대왕이지만 천황의 뜻으로 사용)의 궁([[수도]])을 [[아스카]]에서 나니와 궁(難波宮, 지금의 [[오사카 시오사카시]] [[주오 구주오구 (오사카 시오사카시)|주오 구주오구]])으로 옮기고, 소가 씨를 포함한 아스카의 호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정치 구조가 오키미 중심의 정치로 바뀌게 된 사건이며 「다이카」라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연호를 사용했다. 원래 오오키미(大王)은 황제와 같은 의미로서 일본의 많은 쿠니(国)들을 지배하는 야마토국의 천황의 의미로 사용됐었다.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고 나서부터 오오키미(大王)이라는 단어를 덴노(天皇,천황)라는 글자와 병용하며 쓰기 시작하였다.
 
== 개요 ==
20세기 중후반기까지 일본에서 다이카 개신은 일본의 율령제가 도입된 시기로 이해되었다. 다음 항목은 《[[일본서기]]》 등을 토대로 다이카 개신의 경과를 기록하겠지만, [[1967년]] 12월 [[후지와라쿄]] 북쪽 외호(外濠)에서 발굴된 「기해년<ref>기해년은 서기 699년에 해당한다.</ref> 10월 [[가즈사 국가즈사국]] 아와노고오리(阿波評) 마쓰사토 향(己亥年十月上捄国阿波評松里□)」이라는 명문이 적힌 목간(木簡)이 발굴되면서 그때까지의 「군평(郡評) 논쟁」(후술)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개신의 조」라 불리는 문서도 《일본서기》 편찬시에 가필되고 후세에 윤색되었음이 판명되었다.
 
=== 을사의 변 ===
{{참고|을사의 변}}
 
소가 씨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 [[소가노 우마코|우마코]](馬子) - [[소가노 에미시|에미시]](蝦夷) - 이루카의 4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소가 씨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같은 한반도의 국가의 교류로 세력이 막강하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이러한 소가 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제와 같은 군주, 즉 오키미케(大王家, [[일본 황실]])로 권력을 되돌리고자 가루노 미코(軽皇子, 훗날의 고토쿠 오키미)에게 접촉했으나, 그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만두고 나카노오에노 미코에게 접근하였다. 함께 견수사 출신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에게 학문을 익히고 소가 씨 타도의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같은 소가 씨족임에도 에미시・이루카 부자에게 비판적이었던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결혼하고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 가쓰시로노 와카이누카이노 쓰나다(葛城稚犬養網田) 등을 끌어들였다.
 
나카토미오 가마타리는 소가노 이루카에게 "삼한의 사신이 왔을 때 들고온 서신을 소가노 이루카에게 읽게하자"라고 다짐하였다. 이는 삼한의 사신이 야마토 정권에 보내는 서신이 모욕적이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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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人大兄皇子은 궁에 도망치면서 "한인(韓人)들이 이루카를 죽였다"라고 외쳤다고 한다.「韓人殺鞍作臣 吾心痛矣」
 
쿠데타를 일으킨 中大兄皇子은 야마토의 수도를 나라 아스카에서 오사카의 나니와로 옮기면서 아스카에 수많은 사슴들을 풀어놓았다. 이는 일본에서 "바보"를 뜻할 때 馬鹿라고 부르기 때문이며 소가노 이루카의 세력이 막강하던 수도 아스카에 바보들이 있었다라는 뜻을 내세우기 위해서이다.
 
=== 신정권 발족 ===
을사의 변 직후인 6월 14일에 고교쿠 오키미가 퇴위하고,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자신이 오키미가 되는 것을 사양하는 대신 가마타리와 상담하여 왕제(王弟) 가루노 미코를 즉위시키고(고토쿠 오키미)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이것은 [[스이코 천황|스이코 오키미]] 때 [[쇼토쿠 태자]]가 황태자로서 정치 실권을 쥐었던 것을 답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새로 좌우 오오미(大臣) 두 사람과 우치노오미(内臣)를 임명하고,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실제로 운영하기 위한 「브레인」으로서 구니노 하카샤(國博士)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정치 교체는 쇼토쿠 태자의 정책을 계승한 정치 변혁이기는 하나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소가 씨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 흐름에 반응하여 중앙집권적 · 관료제적인 정치기구로써 권력 집중과 국가 권력을 최고도로 집중시키고 발휘시키기 위한 국정 개혁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 대왕 고토쿠 오키미, 황태자 나카노오에노 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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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에는 도고쿠(東國)에 [[고쿠시]](國司)를 파견하고, 신정권이 목표로 하던 정치개혁에 착수했다(다만 이들 고쿠시는 임시 관직으로서 훗날의 고쿠시와는 같지 않다). 이들 고쿠시는 여덟 개 조(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어느 지역에 파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제3조는 게누(毛野) 방면, 제5조는 도카이(東海) 방면으로 보내졌음을 훗날의 복명(復命) 및 논공행상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신정권은 이같은 넓이를 단위구역으로서 여덟 개 조의 고쿠시를 도고쿠로 파견했다. 가네히쓰(鐘櫃)의 제도도 정하고, 남녀의 법과 양민・노비의 자손의 귀속도 결정되었다.
 
한편 소가 씨와 혈연이 있어 소가노 이루카에 의해 차기 오키미로서 주목받았으나 을사의 변 이후 출가하여 [[요시노]]로 달아났던 후루히토노오에노 미코(古人大兄皇子)가 9월에 모반죄로 처형되고, 12월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셋쓰 국|셋쓰]]의 나니와(難波, 현재의 [[오사카 시오사카시]] [[주오 구주오구 (오사카 시오사카시)|주오 구주오구]]) 나가라노 도요사키 궁(長柄豊碕宮)으로 옮겨 정치의 중심을 호족에서 천황으로 바꾼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 다이카 개신의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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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의 조로서 발호된 주요 정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지금까지 여러 호족들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민(部民)과 전장(田莊)을 폐지하고 그 전답과 백성은 모두 천황의 것으로 한다(공지공민제).
# . 기존의 구니(國), 아가타(縣), 고오리(郡) 등을 정리하고 영제국(令制國)과 그에 부수한 고오리(郡)로서 정비한다(국군제도).<ref>국군제도는 과거 호족의 세력권이던 구니나 아가타 등을 정비하여 오늘날과 같은 구니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갔지만, 실제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개신의 조 이후 몇 년이 지나서의 일이다.</ref>
# . 호적과 계장(호구 대장)을 만들어 나라에서 공민(백성)에게 공지(논밭)를 나누어 준다(반전수수법).<ref>50호를 1리로 하고 장(長) 1인을 둔다. 이장은 마을 안의 호구를 조사하고, 농경과 양잠을 권하며, 법을 위반하는 자를 단속하고, 부역에 고을 사람을 징발하는 것을 관장한다.</ref>
# . 예로부터 내려오는 부역 제도를 폐지하고, 논밭을 기준으로 각 고을의 특산물을 바치게 한다([[조용조]]).<ref>비단 · 명주 · 무명 등은 지역마다의 사정에 따라 골라 낼 수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호(戶)별로 특산물을 바치도록 한다.</ref>
 
이 밖의 다른 제도에 대해서도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