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토 천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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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덴무 천황의 염원이기도 했으며, 이미 덴무조에 공사가 착수되고 있었다고도 하고, 지토 천황이 처음 시작했다고도 한다. 덴무 천황 말기까지 착수되지 않고 있었다는 설에서는 그 이유를 '백성의 노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데서, [[이세]] 행차도 덴무조의 치세와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음이 지적된다. 덴무 천황과의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한 지토 천황의 잦은 요시노 행차는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땅임과 동시에 남편의 권위를 의식해 그 힘을 빌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요시노 행차를 제외하면 이세로 한 번, [[기이]](紀伊)로 한 번 행차했고, 《[[만요슈]]》의 기술에서 [[오미]]에도 한 번 행차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세 행차는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주나곤]](中納言) 미와노 다케치마로(三輪高市麻呂)의 간언도 듣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었는데, 이 행차는 새로운 수도가 될 후지와라쿄의 조영에 지방 호족층의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지적된다.
 
생전 덴무 천황이 자신의 병 쾌유를 빌며 건립을 발원했던 [[야마토 국야마토국]]의 야쿠시지를 완성시키고, 칙명에 따라 기원사로 삼았다.
 
==== 외교정책 ====
외교면에서 덴무조에 이어 계속해 [[신라]]와 통교하는 한편 [[당나라]]와는 공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학문승을 비롯한 일본의 여러 유학생들이 신라로 파견되었다. 《일본서기》 지토 4년([[690년]])조에 보면, 지토 천황은 [[지쿠고 국지쿠고국]] 상양미군(上陽咩郡, 아가쓰마군上妻郡) 주민 오토모베 하카마(大伴部博麻)에게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서 그대는 당의 억류 포로가 되었다. 그 뒤 하지노무라치 호도(土師連富杼), 히노무라치 오유(氷連老), 지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 유게노무라치 간보(弓削連元寶)의 아들 네 사람이 당에서 일본을 공격하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 조정에 상주하려 해도 돌아갈 수 없음을 걱정했다. 그때 그대는 부저 등에게 '나를 노예로 팔아서 그 돈으로 귀국해 상주해 달라' 하였다. 그래서 지쿠시노기미 사쓰야마나 부저 등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대는 혼자 30년 가까이 당에 머무른 뒤에야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대가 조정을 받들고 국가에 충성을 나타낸 것을 가상히 여긴다."며 조칙으로 토지 등의 상을 주었다고 한다.
 
=== 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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