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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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성리학]])
}}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small>[[음력 7월 25일]]</small>)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 [[1월 21일]](<small>[[1863년|음력 1863년]] [[음력 12월 13일|12월 13일]]</small>)<ref>《高宗實錄》《고종실록》 1권</ref> ~ [[1897년]] [[10월 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ref>《高宗實錄》《고종실록》 48권 및 《純宗實錄》《순종실록》 1권</ref>)이다.
 
휘는 '''형'''(㷩)<ref name = "real_name" />,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兒名)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성림(聖臨), [[호 (이름)|호]]는 주연(珠淵), 정식 묘호는 '''고종'''(高宗)이고 시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재위 중의 연호는 [[개국 (조선)|개국]](開國), [[건양]](建陽), [[광무]](光武)이다.
 
== 생애 ==
=== 출생부터 즉위 전 ===
==== 출생과 가계 ====
고종은 [[1852년]],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부대부인|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조선 인조|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은 [[조선 영조|영조]]의 법적 증손자가 되어 [[조선 순조|순조]]와 동항렬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흥선군은 [[조선 문조|익종]]과 동항렬이 되고 고종은 [[조선 헌종|헌종]]과 동항렬이 되었다.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본관이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딸이다.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민치구]]의 딸이며 훗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참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흥친왕|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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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조선 철종|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이원경 (1827년)|회평군]]과 [[영평군 (1828년)|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후사 세상을없이 뜨자승하하자, 흥선군과 [[신정왕후 (조선)|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면을재황을 [[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왕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 즉위 초반 ===
==== 흥선대원군의 섭정 ====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 대원군은[[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 [[비변사]]를 폐지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가비변사에 집중되어 갖고있던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고, 그 밖에 붕당의[[붕당]]의 근거지이고,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 철폐|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는데, 최익현을[[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추었다내비치었다. &nbsp;
 
이어 [[양전 사업|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삼정의 문란|군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세칙을 정리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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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고종 초기에 프랑스 군대와 미국군대가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서학([[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과 [[동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대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1866년]] 1월, 대원군은 러시아의[[러시아 제국|러시아]]의 남하에 위기를 느끼고 견제하고자,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주교가 동의하지 않자, 정치적 이점을 얻을 수 없을거라 여겨, 프랑스인 [[사제|신부]]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도 수천인을 박해하였다.(→[[병인박해]])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 사건|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직할시|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5년후인 1871년에 발생하는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1866년]] 9월,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피에르귀스타브 로즈|로즈 제독]] 군대를 이끌고 [[병인양요|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김포 문수산성|문수산성]]과 [[강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에게 격퇴당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외규장각 도서|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
 
[[1868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묘|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남연군]]의 시신을 두고 협상하려 하였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에 그쳤다.([[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의[[존 로저스 (1812년)|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신미양요]])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어재연 장군기|수(帥)자기]]'를 탈취하였다. 미군이탈취한미군이 탈취한 수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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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br>
이를 자손 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척화비}}<br />
=== 친정과 재위 기간 ===
==== 친정개항과 초반친정 ====
[[1869년]] [[1월 31일]](<small>[[1868년]] [[음력 12월 19일]]</small>)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 개항과 친정 =====
[[1869년]] [[1월 31일]](<small>[[1868년]] [[음력 12월 19일]]</small>)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부산)에서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상소로 받아말미암아 끝났다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민씨]]에 척신의한 정치의척신 경향을정치가 보였다시작되었다.
 
==== 강화도 조약과 개화정책의 실시 ====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small>음력 8월 21일</small>]]) 일본은 [[운요호 사건]](군사 도발)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small>음력 2월 3일</small>]])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체결된다.<ref name="고종시대">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ref>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영토 주권과 사법주권이 무시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결과 [[부산항|부산]](1876년), [[원산항|원산]](1880년), [[인천항|인천]](1883년)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강화도 조약이조약 성립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오군영|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일본식 신식 군사훈련을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양과의 통상 반대와 척화주전론이 제기되었는데, 대원군의 대외 정책과 맞물렸다. 하지만 대원군이 하야하고 정부가 개항과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최익현과 유인석 등의 유생들이 왜양일체론과 개항불가론을 제기하였다.
<br />
 
===== 청의 내정 간섭과 갈등 =====
[[1880년]](고종 17년), 2차 [[수신사]]로 [[일본 제국|일본]]을 방문한 [[김홍집 (1842년)|김홍집]]이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헌|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이에 유생들이 반발하여 [[이만손]]과 [[홍재학]] 등이 [[영남 만인소|만인소]]와 [[척화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책을 들여온 김홍집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1882년]] 4월, 서양의 나라들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파일:Emperor Gojong of the Korean Empire by Percival Lowell, 1884.png|228x228px|섬네일|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파일:Yuan Shikai in uniform.jpg|섬네일|왼쪽|189x189px|[[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
 
[[1882년]](고종 19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촉발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여흥 민씨|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군인들은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읍|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만에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청나라 만에군대의 고종은도움으로 복권하였으며,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마젠창]]과 [[위안스카이]],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 [[위안스카이]]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제물포조약]])
 
또한 청나라와 상민수륙무역장정을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 치외법권을[[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의 외교 고문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명명하였다.<ref name="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32570383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조선일보 2004.03.25</ref>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미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였는데, 이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제정했고, 이듬해 3월 6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했다.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왔다. 1883년 최초의 근대적 국가 기술 표준 기관인 전환국 소속 분석시험소를 설립하고 화폐의 주조 및 금속광물의 분석ㆍ가공ㆍ제련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ref>1883년(고종 20년)에 설립한 전환국 소속 분석시험소는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어, 대한민국 [[국가기술표준원]](KATS)으로 이어졌다. 국가기술표준원은 KS 표준을 정하는 국가 기관이다.</ref>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 갑신 정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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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이해에 개교하였다. 1887년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다.
 
====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
====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
{{참고|동학 농민 운동}}
{{참고|갑오경장}}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 (1842년)|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218x218px|왼쪽|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ref name="망언뿌리1">한계옥, 〈‘국왕 생포 작전’과 왕비 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89~92쪽.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조선 병사의 발포에 의해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도리없이 응전하여 왕궁으로 들어갔다.”이다. 그러나 [[1994년]] 나라 여자 대학 교수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가 발견한 일본군 참모 본부편 《淸日戰爭草案》(42권)은 그 모든 과정이 일본 외무성과 군부가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작전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ref>
 
:* <small>참고 : 아래의 역법은 [[그레고리력|양력(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합니다.</small>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참고|동학농민운동}}[[1894년]] 4월,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되고, [[한국 남부|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농민봉기가 거대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은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6월 6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는데, 9년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 [[톈진 조약 (1885년)|톈진조약]]의 내용에 의거하여, 이틀 후인 [[6월 8일]], [[일본 제국|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인천항으로 일본군대가 들어왔다. 파병 요청 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조선으로 진주하자,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는 서둘러 [[전주화약|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218x218px|왼쪽|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참고|갑오개혁}}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고 [[7월 23일]],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다. [[김홍집 (1842년)|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 (1842년)|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218x218px|왼쪽|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ref name="망언뿌리1">한계옥, 〈‘국왕 생포 작전’과 왕비 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89~92쪽.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조선 병사의 발포에 의해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도리없이 응전하여 왕궁으로 들어갔다.”이다. 그러나 [[1994년]] 나라 여자 대학 교수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가 발견한 일본군 참모 본부편 《淸日戰爭草案》(42권)은 그 모든 과정이 일본 외무성과 군부가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작전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ref>
한편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흥친왕]]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895년]] [[5월 13일]]([[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8월 2일]]([[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 전쟁|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의 전장터는 조선이었다.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이 청나라-일본 양국군대의 전장터가 되었고, 남부지방은 농민군과의 국지적 교전이 계속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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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과 일본-러시아의 내정 간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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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홍집 (1842년)|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하였다.<ref>《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66~67쪽</ref>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 아관 파천과파천 도시 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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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mall>참고 : 아래의 역법은 [[그레고리력|양력(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합니다.</small>
=====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 =====
:* <small>참고 : 아래의 역법은 [[그레고리력|양력(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합니다.</small>
 
[[1896년]] [[2월 11일]]<ref>1895년, [[음력 12월 28일]]</ref>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찰나, 왕태자 척(훗날의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순명효황후|왕태자비 민씨는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을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 (19세기)|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이 시기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ref name="고종시대" />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ref name="고종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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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성립 ===
===== 대한제국 선포 =====
[[파일:Portrait of Gojong 01.jpg|섬네일|왼쪽|200px|고종 황제의 어진]]
[[파일:고종.JPG|섬네일|[[선글라스]]를 쓰고있는 고종]]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인용문2|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고조선)|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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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용의 엄상궁의 귀비, 왕비 책봉 반대운동 =====
[[파일:엄귀비 양장사진.jpg|섬네일|216x216px|왼쪽|후궁 [[순헌황귀비|순헌황귀비 엄씨,]]. [[의민태자|영친왕]]의 생모이다.|대체글=]]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순헌황귀비|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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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 늑약 전후 =====
[[파일:Itô Hirobumi.jpg|섬네일|왼쪽|204x204px|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대체글=]]
{{참고|을사보호늑약}}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조선 고종|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조선 고종|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ref>제2차 한일 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271743670.html 〈‘을사조약 중명전’ 버려진 역사〉], 한겨레, 2004.8.27.</ref>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조선 고종|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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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고종황제가 [[의민태자|이 왕세자]]와 [[이방자|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의민태자|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한일합방|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파일:Funeral for Gojong.JPG|섬네일|250x250픽셀|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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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함녕전]]
|}
|}[[파일:대한제국Imperial 황실family 가족사진of Korea 02.JPGjpg|대체글=|섬네일|오른쪽256x256픽셀|왼쪽부터 의친왕영친왕, 순종, 영친왕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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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인 평가 ===
==== 정치적 능력 ====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ref name="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32570383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조선일보 2004.03.25</ref>
 
[[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ref name="고종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