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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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jong-King of Korea-by.Hubert Vos-1898-detail.jpg|섬네일|200px|right|남편 고종]]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ref name="임370">임중웅, 370 ~ 371쪽에서.</ref><ref name="한28">한영우, 28쪽에서.</ref>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첫 아들인 [[완친왕|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
 
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ref name="임370">임중웅, 370 ~ 371쪽에서.</ref><ref name="한28">한영우, 28쪽에서.</ref>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첫 아들인 [[완친왕|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ref name="임372">임중웅, 372쪽</ref><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 〈국제무대에의 진출〉, 명성황후.</ref>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ref name="한28"/><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8%81%EC%A1%B0&keyword=%EC%98%81%EC%A1%B0 원자가 탄생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1월 4일(경인) 1번째 기사에서.</ref><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8%81%EC%A1%B0&keyword=%EC%98%81%EC%A1%B0 원자가 졸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1월 8일(갑오) 1번째 기사에서.</ref>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ref name="임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