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의용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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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사단 학도병''' - 대구에서 지원한 1차 47명, 2차 40명 도합 87명의 학도병은 수도사단을 거쳐 입대한 16명을 제외하고 71명의 학도명은 포항으로 가게 된다. 1950년 9월 11일 03시경 인민군이 포항여중 전방에 침입했고 전투는 15시까지 4차례나 벌어졌다. 탄약 부족 사태가 발생하여 육탄전도 벌어졌지만 결국 포항여중을 내주었고, 학도병 47명이 전사했고 13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후 113명의 학도병이 보충되어 ''제3사단 학도중대''가 되었다.
# '''해병대 학도병'''
# '''서울학도포병대''' - 제7사단 제18포병대대가 군사력이 부족하여 신형 포를 군인을 모집하는데, 이 때 학생들이 나이를 속이면서 지원하여 용산중 100명, 덕수상업중 30명, 경동중 25명, 한양공업중 20명, 서울중 11명 등등 성루 지역 30여 학교에서 재학생 341명이 선발된다. 하지만 1950년 11월 26일 평안남도 덕천군 일대에서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던 중 130여 명이 전사했다.
# '''인천학도의용대'''
# '''제1유격대대''' - 1950년 8월부터 대구역 광장에서 모병 활동을 통해 학도병 560여 명으로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9월 11일까지 유격훈련을 실시한 후 9우러 14일 경북 영덕군 장사동에서 상륙작전을 펼쳤으며 장사동 상륙에 성공한 후 적의 200고지를 점령했다. 인민군 제5사단과 치열하게 전투하는 동안 270여 며으이 적을 사살하는 결과를 내지만, 139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 '''소년학도병''' - 15~17세의 어린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51년 3얼 16일 '종군학생 복교령' 조치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군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년병은 약 25,000여명이 있었으며 확인된 전사자 2,464명, 전상자 3,000명이 있다. 이들 중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사람은 347명이며, 위패로 봉안된 영현은 1,188명, 유해, 위패도 없는 전사자가 92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