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세이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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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러 함정에서 해상근무를 하다가 포술 장교로서 [[러일 전쟁]]에 참전하였고, 참모로서 일하다가 장교로서 출세 코스인 해군대학교에 입학해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다시 해상근무를 하다가 행정 장교로 [[일본 해군성|해군성]] 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이때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해군 대신의 비서관으로 근무하여 해군성 내에서 지위가 확고해졌다.
 
1911년 영국, 또 1913년에는 미국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돌아와서도 계속 행정직으로 근무하다가 1916년 "[[히라도]]" 함장으로 단 한 차례 근무한 것이 그의 유일한 함장경력이다.
 
=== 해군의 요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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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3함대 사령관을 거쳐 요직이었던 해군성 군무국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국제적 군축조약의 준수를 주장하여 후에 영미협조파의 주요인물로 간주되었다. 1926년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군축조약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実)의 전권대사를 수행하였다. 이 협상은 국제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고바야시는 조약을 준수해야한다는 협상파에 속해서, 협상을 반대하던 하라 간지로 등의 함대파와 대립하였다.
 
회담이 결렬된 후 귀국하여 연습 함대의 사령관으로서 소위후보생들의 원양항해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다시 조약파와 함대파 사이의 대립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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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
1941년 자리에서 물러나 군에 관련된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위험시되어 헌병의 감시를 받았다. 1944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일본의 1당독재 체제인 [[익찬정치회]]의 총재에 취임하였다.이해 12월에는 [[고이소 구니아키내각]](小磯國昭) 내각의 국무 대신에 임명되었다. 이후 익찬정치회가 내분이 일자, 그는 1945년 3월 대신직을 사임하고 이를 수습하려고 하지만 실패하였다.
 
종전이후, 그는 미군정 사령부에 전범 용의로 구속되어 조사받았지만, 곧 풀려나왔다. 이후 그는 귀족원에서 사퇴하여 정계를 완전히 떠났다. [[1962년]], 도쿄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