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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감행하였으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대전의 동쪽)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처형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대패하고, 결국 의자왕은사비성이 신라에 항복하고함락되면서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왜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 · [[웅진성]] 등을 포위 · 공격하여 당군(唐軍)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의 재침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부흥군은 계속 패배하여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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