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은거했다
태그: 각주 제거됨 시각 편집
억을 어
13번째 줄:
같은 해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가 있자, 왕이 박의중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 때 그는 참위(讖緯)의 학설이 허황되고, 당시의 민심이 불안함을 역설하며 이에 반대했다.
 
얼마 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ref>『고려사』 「박의중전」</ref>,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억갔다들어다. 이후 숙부 박인익과 함께 낙향 은거했다. 은거 한 곳은 김제군 백산면 박성뫼(박씨성이 정착한 곳) 마을이라고 구전되고 있는데, 이 마을의 현 행정구역상 명칭은 김제시 상동동 옥정이다.
 
[[조선 태종|태종]](太宗)이 그를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로 임명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고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