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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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개입 =====
{{참고|한국전쟁}}
1949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1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과 스탈린 회담 △ 49.3.5=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할 때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킴.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ref>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ref>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ref><ref>{{웹 인용 |url=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제목=Kbs News<!--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6-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308172301/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보존날짜=2018-03-08 |깨진링크url-status=dead }}</ref><ref>{{뉴스 인용 |url =/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의 통일전쟁 제의 △ 1950.1.19.=슈티코프 대사는 1월 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북한 지도부와의 대화내용을 소련 외무성에 보고. 이 리셉션에서 김일성은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면서 “통일이 늦어지면 남한 인민은 대단히 실망할 것”이라고 언급. 북한쪽은 49년 3월 스탈린이 남한의 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했지만 이승만이 공격을 늦추고 있어 반격 시행의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현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 소련 외교관들이 이에 관해 대화를 회피하자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자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재차 반복. “스탈린과 만나 남조선의 상황과 남진공격 문제를 토의하고 싶다. 이번에 만날 수가 없으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모든 문제에 관해 지시를 받아올 것이므로 모스크바에서 돌아올 때 그와 만나겠다. 왜 나의 옹진작전을 허락안해주는가. 총공격으로 넘어가면 며칠후에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다. 스탈린의 조언을 듣고 싶다.”-->}}</ref>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url =/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스탈린의 개전 동의... △1.30 =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 전문에는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됨.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 -->}}</ref>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4.? = 모스크바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ref>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0.5.3= 김일성과 박헌영 베이징에 도착,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필리포프(스탈린) 동무가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 △5.4=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ref>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ref>{{웹 인용 |url=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제목=Kbs News<!--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6-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308172301/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보존날짜=2018-03-08 |깨진링크url-status=dead }}</ref>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ref name="kath">[https://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CWIHPBulletin3.pdf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ref>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