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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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fenestration-prague-1618.jpg|섬네일|30년 전쟁의 촉매제가 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마티아스]] 황제가 아들 없이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왕조를 가짐으로써 그의 정연한 변화를 확실시 하려고 했다. 그는 열렬한 가톨릭 지지자인 [[이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좌로 선출하려고 했다.<ref>{{웹 인용|url=http://steveedney.wordpress.com/2006/05/23/the-defenestration-of-prague/|title=The Defenestration of Prague|website=Criticality|author=Steve Edney|date=23 May 2006|accessdate=25 May 2008}}</ref> 몇몇 보헤미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루돌프 2세 (신성 로마 제국)|루돌프 2세]] 때 루돌프 칙령 (또는 [[폐하의 서신]])이라 불리는 종교 칙서로 당연히 인정받은 종교 권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개신교 제후동맹]]을 설립한 [[프리드리히 4세]]와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5세 (팔츠)|프리드리히 5세]]를 지지했다. 그는 팔츠 선제후이기도 했다.<ref name="tripod">{{웹 인용|url=http://thirtyyearswar.tripod.com/revolt.html|title=Bohemian Revolt|website=thirtyyearswar.tripod.com|accessdate=25 May 2008}}</ref> 그러나 다른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이 주도하는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visualstatistics.net/east-west/War%20West/War%20West.htm#Thirty|title=Wars of the Western Civilization|publisher=visualstatistics.net|accessdate=24 May 20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1204145814/http://www.visualstatistics.net/East-West/War%20West/War%20West.htm#Thirty|보존날짜=2008년 12월 4일|깨진링크url-status=dead}}</ref> 16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선출되었고 마티아스가 죽자 자연스레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왕의 선출 이후 2명의 가톨릭 의원들이 1618년 5월 프라하 성의 대표로 보내졌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결석 동안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1618년 5월 23일 개신교 의회는 그들을 포위하고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들은 추락했으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 알려진 이 사건으로 보헤미아 반란이 시작되었다. 곧 보헤미아 분쟁은 [[보헤미아 왕국]], [[실레시아]], [[루사티아]]까지 번졌다. 모라비아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모라비아 지역의 분쟁은 다시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네덜란드]],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왕국]], [[잉글랜드 왕국]] 등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이 사태에 개입하거나 아니면 예의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tripod"/>
 
[[파일:Bila hora rekonstrukce 4.jpg|섬네일|왼쪽|200px|[[백산 전투]]의 재현]]
보헤미아 분쟁은 여전히 지역적인 분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개신교 반란 지도자들은 대담해졌다.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공식적인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 반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분쟁이 서부 독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그의 조카 [[필리프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에 맞선 동맹에 대해 결사적이었던 보헤미아 인들은 칼뱅파였던 팔츠 선제후였던 칼뱅교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의 후보로 내세우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 제후동맹을 이끌고 있었다. 보헤미아는 제후동맹에 자국을 가입시켜준다면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작센 선제후국의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1세|요한 게오르크 1세]], 헝가리 왕 [[베틀렌 가보르]]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프라하를 떠나는 모든 서신들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인은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공연히 알렸다.<ref>{{서적 인용|author1=T. Walter Wallbank|author2=Alastair M. Taylor|author3=Nels M. Bailkey|author4=George F. Jewsbury|author5=Clyde J. Lewis|author6=Neil J. Hackett|author7=Bruce Borland (Ed.)|title=Civilization Past & Present Volume II|publisher=Harper Collins Publishers|pages=''15. The Development of the European State System: 1300–1650.''|location=New York, N.Y|year=1992|isbn=0-673-38869-7|accessdate=23 May 2008|url=http://history-world.org/The%20Thirty%20Years'%20War.htm|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614022544/http://history-world.org/The%20Thirty%20Years'%20War.htm|보존날짜=2016-06-14|깨진링크url-status=dead}}</ref> 이는 보헤미아인들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작센은 아예 이들에게 신임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족들 대부분이 루터파와 칼뱅파였던 [[오버외스터라이히]]가 반란에 동참했고, 곧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진트리히 마타야스 트런]]이 [[비엔나]]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더욱이 영국 제도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유럽의 조엘리라 묘사되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문제로 비춰지게 되었다.<ref>Kellie, ''Pallas Armata'', p. 2a; Monro, ''His Expedition'', vol. 1, p. 37.</ref> 이는 30년 전쟁 전반에 걸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흐름을 내놓기도 했다. [[호레이스 베레]]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전쟁 초기에 팔츠 선제후 지역으로 이동했고 존 세톤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후에 이들은 혼성 부대인 브르타뉴 여단에 참여하게 된다.<ref name=polisensky>Joseph Polisensky, "A Note on Scottish Soldiers in the Bohemian War, 1619–1622" in Steve Murdoch (ed.), ''Scotland and 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Brill, Leiden, 2001), pp.&nbsp;111–114</ref> 세톤의 여단은 1622년까지 트레본 마을을 사수한 여단으로, 보헤미아에서는 최후의 개신교 동맹이었다.<ref name=polise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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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제국의 지원 ===
[[파일:Gerard van Honthorst 006.jpg|섬네일|오른쪽|200px|프리드리히 5세의 초상화.]]
[[트란실바니아]]의 공작이자, 헝가리 개신교도의 왕이었던 [[베틀렌 가보르]]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 때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2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공포 정치로 베틀렌은 오스만 2세에게 보호를 해달라 부탁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기를 일으키고 개신교도의 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한 이후 보헤미아 내 여러 국가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보헤미아의 유일한 동맹국이 되었다.<ref>{{서적 인용|title=An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ttoman Empire|author1=Halil İnalcık|author2=Suraiya Faroqhi|author3=Donald Quataert|author4=Bruce McGowan|author5=Sevket Pamuk|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year=1997|isbn=0-521-57455-2|pages=424–425|url=https://books.google.com/books?id=6fYCLCZLETgC&pg=PA424}}</ref> 하인리히 비터가 [[이스탄불]]을 1620년 1월 방문했고, 메메트 아가가 1620년 7월 프라하를 방문했다. 오스만 제국 기병은 프리드리히에게 6만 명의 기병을 주었고, 40만 명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술탄에게 바치는 연간 조공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6I28d7vAabgC&pg=PA112|title=The Winter King: Frederick V of the Palatinate and the Coming of the Thirty Years' War|author=Brennan C. Pursell|pages=112–113|publisher=Ashgate|year=2003|accessdate=18 May 2012}}</ref> 이 협상은 1620년부터 1621년까지 발발한 [[폴란드-오스만 전쟁 (1620년-1621년)|폴란드-오스만 전쟁]]을 촉발시켰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b912JnKpYTkC&pg=PA347|title=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volume=Volume I: The Origins to 1795|author=Norman Davies|year=2005|accessdate=18 May 2012|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isbn=0-19-925339-0}}</ref> 오스만 제국군은 1620년 9월부터 10월까지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체초라 전투]]에서 패배시켰다.<ref>{{서적 인용|author=Ezel Kural Shaw|title=History of the Ottoman Empire and Modern Turkey|page=191|url=https://books.google.com/books?id=Xd422lS6ezgC&pg=PA191|deadurlurl-status=dead|확인날짜=2016-06-2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111112934/http://books.google.com/books?id=Xd422lS6ezgC&pg=PA191|보존날짜=2014-01-11}}</ref> 그러나 1620년 11월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패배할 때는 오스만 제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6fYCLCZLETgC&pg=PA424|title=An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ttoman Empire|volume=Volume 2: 1600–1914|editor=Halil İnalcık|pages=424-425|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year=1994|isbn=0-521-57455-2|accessdate=18 May 2012}}</ref> 1621년 폴란드군이 재정비해 초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패배시켰고 양국의 전쟁은 원상복귀되었다.<ref>Leszek Podhorodecki: Chocim 1621, seria: Historyczne bitwy", MON, 1988.</ref>
 
우스코크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황제는 보헤미아와 그들의 동맹국을 그의 압도하는 수로 누르려고 했다. 황제군의 사령관 부코이 백작은 [[에른스트 만슈펠트]]가 지휘하는 개신교도 제후동맹을 1619년 6월 10일 [[사브레 전투]]에서 격퇴시켰고, 이것은 트런 백작이 프라하와 연계하지 못함으로써 비엔나 포위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확대에 있어서 오랜 적이었던 [[사보이 공국]] 또한 이 전투로 피해를 입었다. 개신교도들의 중요한 동맹이었던 사보이 공국은 개신교도들에 자금을 지원해주고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만슈펠트의 패배가 사보이의 개입을 알림으로써, 이들은 전쟁에서 잠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1630년 스웨덴 제국이 참전한 이후 다시 30년 전쟁에 개입한다.